주기도문 강해
주기도문 강해 9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2020.09.18 16:00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마 6:13)
흔히 교회 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자주 쓰는 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1) ‘은혜’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라는 말 많이 하시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을 우리는 참 많이 합니다. 본디 ‘은혜’란,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공로 없이 어떤 것들이 주어지면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 믿음생활’은 곧 ‘은혜’입니다. 믿음생활을 위해 나 자신이 기여한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라는 말을 합니다. 또 하나가 있죠! 2) ‘감사’입니다. 물론, 비그리스도인들도 ‘감사’라는 말을 많이 하고, 그 소중함을 압니다. 그래서 서점에만 가 보더라도 감사에 대한 책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감사’를 강조한다 해도 교회 안에서 강조하는 감사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오죽하면 성경은 성도의 생활에 있어 “범사에 감사하라”고까지 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감사’는 성도에게 하는 말씀의 명령입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당위성을 가진 삶의 덕목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외에도 여러 단어들이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면서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용하는 말 중에는 ‘부정적인 말, 단어’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바로 ‘시험’이라는 말이 있지요. 어떤 회사에서 신입 사원을 뽑기 위한 시험이 새벽 4시부터 시작된다고 공고되었습니다. 너무 이른 시간이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시간에 맞춰 일찍 회사의 시험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공고된 새벽 4시가 지나도 회사 문은 열리지 않은 채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응시자들이 여기저기서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예정된 시간보다 무려 5시간이나 지난 아침 9시가 되어서야 회사 문이 열렸습니다. 이러한 회사의 무성의에 대해 여기저기서 또다시 불평과 불만이 쏟아졌고 상당수의 응시자들은 화가 나서 돌아가 버렸습니다. 9시가 조금 지나 면접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면접관의 질문이 가관이었습니다. "한국의 수도는 어디입니까?" "사람의 손가락은 몇 개입니까?" "우리나라 대통령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는 식의 정말 질문 같지 않은 질문만 늘어놓고는 면접을 끝냈습니다. 황당한 것은 입사시험이란 게 그게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며칠이 지난 후, 단지 몇 명에게만 합격 통지서가 배달되었습니다. "저희 회사 입사시험에 합격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몇 가지 테스트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습니다. 첫째, 당신은 시간을 잘 지켰습니다. 새벽 4시 정각에 도착하신 것을 저희는 보고 있었습니다. 둘째, 당신은 인내심이 있었습니다. 5시간을 잘 인내하며 기다리신 것을 저희는 모두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평범하고 어쩌면 짜증날지 모르는 질문에도 성실하게 그리고 온화하게 대답하여 성품으로도 원만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저희 회사에서 요구하는 1) 시간 지키기, 2) 오래 견디기, 3) 원만한 성품이라는 3가지 선발기준에 모두 합격점수를 얻었으므로 귀하를 본사에 채용하기로 하였습니다."라는 내용의 통지문이었습니다.
그래요, 여러분~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에 ‘시험’이라는 게 많은 것 같습니다. 어쨌든, 성도의 삶을 들여다보면 ‘시험’이라는 말도 참 자주 쓰이는 것 같습니다. “누구 때문에 시험 들었어!”, “무슨 일 때문에 시험 들었어!”등등. 그렇죠? ‘시험에 들었다’, 또는 ‘시험에 빠졌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것이지요. 평소 교회에 잘 나오던 사람이 어느 날부턴가 보이지 않아 연락을 해보면 “나 시험 들었어요!“라고 당당히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험에 들었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좋게 말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것이겠죠? 조금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일테고요. 어찌 되었든, 이럴 때, 흔히 성도들은 ‘시험’이라는 말을 쓴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바로 이 ‘시험’에 대해 여러분과 나눠보고자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도대체 이 ‘시험’은 무엇일까요? 원래 ‘시험’이라는 단어는 우리말로 보아도 혹은 영어 단어로 보아도 크게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말 사전으로 보면, 1) 재능이나 실력 따위를 일정한 절차에 따라 검사하고 평가하는 일, 2) 사람의 됨됨이를 알기 위하여 떠보는 일, 또는 그런 상황. 이렇게 두 가지의 의미로 나누어 정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어떻게 보면 영어로 설명하는 것이 더 쉽고 여러분이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영어 단어를 가지고 설명하고자 합니다.
1. TEST
흔히 우리 자녀들이 보는 중간고사 또는 기말고사와 같은 그야말로 아이들의 실력을 검증해 보는 절차로서의 시험이나 혹은 운전면허와 같이 어떤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기준에 부합하는지의 정도를 검증하는 절차를 흔히 ‘테스트’라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 학생들의 실력, 운전에 있어 필요한 조건들을 충족하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테스트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1) 사랑하기 어려운데 사랑하라고 하는 것! 2) 듣기 싫은 설교를 목사가 해야 하는 것! 등등. 이런 것들도 하나의 ‘테스트’에 속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만히 보면, 이러한 것들이 결코 성도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하는 것이며 자신을 돌아보면 더 견고한 믿음을 갖게 하는 과정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테스트의 근거가 바로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1) 창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하나 뿐인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시험, 곧 ‘테스트’가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NIV 성경을 보면, ‘God tested’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테스트’라는 것입니다.
2) 요 6: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오병이어 사건의 본문입니다. 수많은 굶주린 군중을 보고 주님께서 빌립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면 좋겠느냐’고 물으시는데 그 물음의 의도가 바로 빌립을 향한 주님의 ‘테스트’였다는 것입니다.
3) 욥의 이야기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그를 테스트하는 과정을 통해 결국 욥의 믿음이 더욱 단단해지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압니다. 욥 자신도 그렇게 고백합니다. 욥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다소 역설적이긴 하지만 이런 테스트는 우리의 영적 성장에서 굉장히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테스트로 인하여 더 강한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테스트에서 넘어지는 성도가 아니라 이 테스트를 넘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TEMPTATION
이 단어가 가진 의미는 앞서 나눈 ‘테스트’의 의미가 아니라 그야말로 ‘유혹’입니다. 우리말 사전에서 유혹은 “꾀어서 정신을 혼미하게 하거나 좋지 아니한 길로 이끄는 것”을 유혹이라고 합니다. 이런 대표적인 성경의 예가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마귀가 우리 예수님께 행한 시험인데요. 이것이 바로 ‘템프테이션’입니다. 앞서 나눈 예를 가지고 설명하자면,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지만 사랑하지 않고 더욱 미워하는 것! 바로 이것이 ‘유혹에 빠진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듣기 싫어서 목사님의 말씀에 마음을 닫아버리는 것 또는 자기에게 유익한 것만 골라서 취하는 것! 바로 이것이 ‘템프테이션’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러한 예를 찾아보자면, 1) 눅 22: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2) 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여기서 ‘시험’을 NIV성경에서는 ‘temptation’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유혹은 성도의 믿음을 강하게 하고 영적인 생활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 멀어지게 하고 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고 하면서 ‘시험’이라는 단어를 주님께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오늘 본문의 ‘시험’은 ‘test’일까요?‘temptation’일까요? 이것을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데요.
오늘 본문을 보면 마태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고 하면서 이 기도의 뜻, 의미를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해서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말을 뒤에 덧붙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원문 성경에서 본문의 ‘시험’을 헬라어 ‘페이라스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요. 이 단어는 앞서 여러분과 나눈 것처럼 ‘테스트’와 ‘유혹’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어디에 더 가까운지를 알아야 하는데요. 본문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테스트)하시기는 하지만 유혹하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약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이 말씀에서 ‘시험’이 ‘temptation’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유혹하여 곁길로 나가도록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이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나눈 아브라함이나, 욥의 경우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고 우리 믿음의 영적 성장을 위해 ‘시험(테스트)’하시지만, 결코, 유혹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테스트’는 하나님께서 하시지만, ‘유혹’은 사탄이 합니다. 성경이 이것을 증언하는데요. 성경 곳곳에서 유혹하는 주체로 ‘사탄’을 지목합니다(마 4:1, 3; 막 1:13; 눅 4:2; 고전 7:5; 살전 3:5). 하나만 볼까요? 고전 7: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성도를 믿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끊임없이 유혹하는 자들이 바로 ‘사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한편, ‘들게 하지 마시옵고’를 원문대로 해석하면 ‘인도하지 마옵소서’, ‘끌어들이지 마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끌어들인다’는 말은, “우리가 그 속에 빠져 가지 않도록 허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시험’은 ‘유혹’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잘 압니다. 아담을 유혹해서 온 인류를 죄악으로 몰아넣었던, 가룟 유다를 유혹해서 우리 주님을 팔아넘긴 그 사탄의 유혹을 결코 우리의 힘으로 저지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사탄의 유혹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막아주십시오”, “사탄의 유혹에 떨어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막아 주십시오”, “우리로 하여금 사탄의 유혹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주십시오”라고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간구의 절대적인 당위성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래요!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는 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욱 이 간구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내 자녀가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 교회가, 우리 사회가, 이 나라가…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이 간구를 매일같이 우리의 삶에서 간구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조금은 잠잠할 것 같았던 코로나 19의 폭발적인 증가로 우리 사회가 많은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혼란의 중심에 ‘교회’가 있다는 것이 제 마음을 너무도 아프게 합니다. 연일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고,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의 복음이 값싼 것으로 되어가는 오늘의 현실이 너무도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본디 우리 기독교는 사람을 살리고 가정과 사회와 나라를 치유하며 회복시키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러한 삶을 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는 기독교의 진리가 왜곡되고, 변질해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종교가 신의 기적적인 능력을 시험하는 장이 될 때 종교는 진리에서 떠나 미신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지만, 종교가 미신이 되면 상식을 뛰어넘게 됩니다. 유감스럽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종교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 어느 특정한 사람이 능력이 있다든지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나면 사람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맹목적으로 그곳으로 몰립니다. 잘못된 종교는 하나님을 자기의 뜻으로 시험합니다. 자기의 뜻을 이루어주면 참신이라 생각하고, 이루어주지 않으면 ‘믿지 못할 신’ 또는 ‘능력 없는 신’으로 낙인을 찍고 믿음을 포기해 버립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입맛대로 재단하고, 판단해서 분류합니다. 이런 태도야말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신비주의 신앙의 소유자였던 엘리 위젤은 수용소에서 드린 유대인들의 신년예배에서 ‘무기력한 신’을 경험합니다. 위젤은 이때의 경험을 ‘흑야’라는 소설에서 이렇게 묘사해 놓았습니다. “나의 하느님, 당신은 뭡니까? 당신에게 신앙과 분노와 반항심을 고백하는 이 시달림을 받는 무리에 대해 당신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모든 허약과 이 와해와 이 부패 앞에서 우주 만물의 주이신 당신의 전능 전지하심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저들의 마음과 저들의 불구된 육신에 왜 아직도 고통을 주십니까?” … 이날 아침 나는 하느님께 더 이상 간청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미 슬픔에 잠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와 반대로 나는 내가 대단히 강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원고였고 하느님이 피고였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하느님도 인간도 없는 어떤 세상에 아주 완전히 홀로 있을 뿐이었다. 거기엔 사랑도 자비도 없었다. 오직 재가 되기로 마음을 정한 나는 나의 인생이 그렇게 오랫동안 매여 있던 그 전능하신 하느님보다도 나 자신이 더 강하다고 느꼈다. 나는 기도하는 회중을 마치 낯선 사람처럼 지켜보며 회중 가운데 서 있었다.”
말끝마다 믿음을 내세우는 사람들 중에는 종교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이 모든 병을 낫게 해주고, 개인이 당하는 모든 불행을 물리치고, 사회적 불의와 불평등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믿음이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이 아니라 육신의 모든 욕구를 채워주는 ‘희망 고문’의 도구가 되면, 마르크스의 말처럼 사람들에게 고통을 잊게 해주는 아편이 되고, 현실 도피의 수단이 됩니다. 이런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진짜 신이 아닙니다. 이런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인간이 마음대로 조종하고 부릴 수 있는 존재로 죽음을 가져다주는 우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탄은 예수님께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했습니다. 주님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도 연약한 인생이기에 자칫 지나친 믿음으로 인해 시험에 들 수도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만, 잘못 믿는 것보다는 차라리 안 믿는 것이 좋습니다. 잘못된 종교는 본인 뿐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까지 피폐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눈을 뜨고, 마음을 열고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환상적인 종교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하는 우리 교우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핍박 아닌 팝박을 받고, 정죄를 당하는 이 시대, 여러분이 붙잡아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임을 잊지 마시고, 환상이나 값싼 기독교 복음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만을 붙잡고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며 여러분 앞에 주어지는 어떤 시험과 고난에서도 우직하게 나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셔서, 골리앗과 같은 세상에서도 오직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우리 모든 교우들이 되시기를 여러분의 힘이요, 소망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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