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강해
주기도문 강해8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2020.09.18 14:05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대해 여러분과 나눈 시간이 오늘로 여덟 번째 시간을 맞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앞서 나눈 내용들이 잘 기억되는지요? 좀 오래되다 보니 가물가물 할 것 같은데요. 그래서 앞에 나누었던 내용들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기억해 보는 시간을 먼저 가지면 좋겠다 싶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본격적인 청원이 6개가 있다고 말씀드렸죠. 그리고 이것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청원 3개와 ‘우리’로 시작되는 청원 3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청원에는, 1)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영광을 받으시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했습니다. 2) 나라가 임하시오며 – 하나님의 주권이 이루어지는 세상에 관한 의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3) 뜻이 이루어지이다 –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의 구원과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을 닮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어서 ‘우리’로 시작되는 3개의 청원 가운데, 지난 주에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이 기도의 의미를 3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는데요. 1) 솔직한 기도의 표본이라고 했습니다. 2) 매일의 삶을 감사로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3)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육체까지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담겨 있는 기도문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세 번째 의미가 중요한 이유는, 당시 철학자들은 육체(육신)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극단적 이분법적 사고의 함정에 빠져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영지주의자들처럼, 당시는 영적인 것은 귀하게 여겼지만 육적인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육을 경시할뿐 아니라 육신을 위해 사는 것을 매우 천하게 여겼습니다. 우리나라 조선 시대도 그랬죠. ‘성리학’이라는 학문이 유입되면서 실학이 추구했던 실제적인 것, 곧 삶과 친밀한 것에 대한 가치는 하락했고, 정신적인 것에 더욱 가치를 두게 되었죠. 그래서 ‘실리’보다는 ‘명분’, ‘체면’을 앞세우고,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문화가 팽배했었죠.
어찌 되었든,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우리’로 시작하는 청원 기도 가운데 가장 먼저 기도할 내용으로 가르쳐 주신 것은 바로 ‘육신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 기도할 때 ‘고상한 척’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이사야 37장-앗수르 왕 산헤립의 모욕적인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펼쳐 놓고 기도함! 사 37:17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뜨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람을 보내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 /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자세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신가요? 미사여구를 사용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아뢰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육신적인 것들을 위하여 간구한다는 것은 어린아이의 신앙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따르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게 순전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가운데 ‘우리’로 시작되는 첫 번째 기도의 메시지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로 시작되는 두 번째 청원인 오늘 본문을 살펴봅니다. 여러분~ 두 번째 간구인 오늘 본문에 기록된 기도의 중심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바로 ‘용서’입니다. 여러분~ 용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소 이기적이지만 나의 잘못은 용서받고 싶고, 다른 사람의 잘못은 용서해 주기가 참 어려운 게 우리의 모습인 것 같아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누군가를 용서해 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용서’, 쉽던가요? 쉽다고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여러분~ ‘용서’는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밀양’이라는 영화를 아시죠? 전도연 씨가 여주인공으로 나왔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고로 남편을 잃은 여주인공 신애는 어린 아들 준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옵니다. 도피처로 삼고자 온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아들이 유괴를 당하고, 끝내 주검이 되어 돌아옵니다. 아들마저 잃은 신애는 방황 끝에 하나님을 찾게 되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서 마침내 자신의 아들을 유괴하여 살해한 범죄자(아들 웅변학원 원장)를 용서하기로 마음을 먹고 교도소로 면회를 갑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해주기 위해 찾아왔다고 말하는 신애에게 원장은 자신도 감옥에서 하나님을 만나 회개하고 잘못을 용서받았노라, 그리하여 마음의 평화를 얻었노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에 신애는 무너집니다. “이미 용서를 얻었다는데 내가 어떻게 다시 용서를 해요.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그 인간을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여러분! 이렇게 용서가 어렵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자신은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상처가, 그 아픔이 다시 생기면 저 마음 깊숙한 곳에 억눌려 있던 감정이 치솟아 오르는 게 사람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진정한 용서’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용서’에 대한 기도를 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본격적으로 ‘용서’에 대한 말씀을 나누기에 앞서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입니다. 흔히 ‘은혜’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크게 두 가지의 은총 또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1) 일반 은총이 있습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자들, 곧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비, 태양, 공기, 자연, 물, 이슬’과 같은 것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은총인 것입니다. 이것을 일반 은총이라고 하는데요. 이 은총이 있기에 이 땅의 모든 사람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 특별 은총, 특별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을 말합니다. 그래요! 여러분! 성도 된 우리에게 있어서 귀한 것이 바로 이 특별 은총입니다. 이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렇게 특별 은총이 귀한 것인데, 문제는 그 특별 은총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가 용서 받고 우리의 죄가 씻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렇게 성경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저주의 울타리라라고!!! 이렇게 죄는 나쁘고 저주의 울타리인데 문제는 인간 스스로가 그 죄의 울타리를 없앨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방법은 ‘하나’뿐이라고 합니다. 바로 하나님이 용서하셔야 우리가 죄의 사슬에서 헤어 나올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대가를 모두 치르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특별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특별 은총의 출발은 항상 우리의 죄 사함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죄 용서’는 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여러분! 주기도문 강해를 처음 시작하면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기록된 복음서가 마태와 누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마태복음 6장, 누가복음 11장인데요. 두 번째 청원이 기록된 마태와 누가복음의 본문 중에서, 마태의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문장과 누가의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에 문장에서, 공통의 단어인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가 마태와 누가의 본문에서 각각 다른 단어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오페일레마타”(복수)로, 누가는 “하마르티아스”(복수)라는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마태가 기록한 ‘아페일레마타’는 ‘빚들’이라는 의미를 갖는데요. 원문대로 번역하면, “우리의 빚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가 됩니다. 반면, 누가가 기록한 ‘하마르티아스’는 ‘죄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우리의 죄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쯤 되면 고민이 생기죠! ‘어느 것이 본래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용어에 가까운 것인가?’하는 문제입니다. 정답은, 마태가 기록한 ‘빚들’입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눅 11: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에서, 앞의 “우리에게 죄 지은”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마태가 기록한 ‘빚’의 의미를 갖는 ‘오페일론티’라는 단어를 누가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지고 있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있기 때문에”로 번역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왜 누가는 ‘빚’이라는 단어를 ‘죄’라는 말로 바꾸어 놓았을까?”라는 질문이 생기겠죠.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죄를 ‘하나님에 대한 빚’으로 보았고 또 ‘이웃에 대한 빚’으로 보았던 유대적 관점을 반영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죄’를 하나님에 대한 ‘빚, 부채’로 보았습니다. 이것은 죄의 엄중함을 표현한 것인데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부채를 진 사람은 그 부채를 갚기 전에는 부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부채(죄)는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해결책은 ‘탕감’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탕감해주시지 않으면 결코 그 부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엄중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마 18장에 나오는 ‘불의한 종의 비유(만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입니다. 이런 유대적 사고에 익숙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했던 누가는 그 뜻을 명확하게 하려고 ‘빚’을 ‘죄’라는 말로 풀어서 우리에게 써 준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와서, 꼼꼼하게 보면 문장이 좀 이상해 보입니다. 다시 볼까요?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쉽게 말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한 것 같이 하나님도 우리의 죄의 빚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때요? 좀 이상하죠? 이렇게만 보면, 우리 이웃에 대한 우리의 용서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듯한 어감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본래적 의미를 모른 채, 이렇게만 보면 상당한 불편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본래적 의미를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는데요. 1) 유대교적 배경과 그들의 언어에 관한 최고의 연구자로 꼽히는 요하킴 예레미아스의 연구에 따르면,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죄들)을 용서하겠나이다”로 재해석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청원인 ‘용서’에 관한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을 향한 일종의 ‘서약’의 성격을 담고 있는 본문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웃에 대한 죄 용서 없이 하나님에 대한 죄 용서 받음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라면, 그의 삶으로 실천하는 ‘실제적 삶’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삶이 쉽냐는 것이지요. ‘불의한 종의 비유’처럼,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그 힘, 곧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가 ‘육적인 것‘을 위한 기도라면, ‘용서를 위한 기도’는 바로 ‘영적인 것’을 위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용서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하게 되면 우리의 영이 건강해지고 아름다워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장과 성숙’을 이룰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참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용서의 기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늘 하나님께 간구할 때, 이 용서의 기도도 반드시 아뢰어야 합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늘 용서를 간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용서를 간구하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바로 ‘회개와 죄 고백’입니다. 눅 17: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그래요! 여러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후회가 아니라 회개입니다. 또 이렇게 보면 우리가 읽은 본문이 조금 이상해 보이죠? 회개보다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에 대해 먼저 말씀하시니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의 본문이 갖는 본래적 두 번째 의미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2) 오늘 본문이 말씀하시는 또 하나의 의미는 죄 사함 받은 증거로 우리가 용서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의 용서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께 용서 받은 표시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용서를 기억하면서 우리는 용서에 대해 인색하면 안 된다는 것을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스데반의 순교 장면_“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어떻게 스데반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죄 사함 받은 은혜’가 그에게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묻습니다. “형제가 범죄하면 몇 번이나 용서할까요? 일곱 번 할까요?” 그러자 우리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 여러분!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용서 받은 감격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이 기도는 아주 중요한 간구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구원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영이 사는 길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품고 사는 성도라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회개를 통한 ‘죄 사함’의 은혜의 감격을 소멸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 한 여인이 포도를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중병에 걸린 외아들이 포도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입니다. 길을 가던 여인은 궁궐의 담벼락에 탐스런 포도가 주렁주렁 열린 것을 보고 관리인에게 사정했습니다. “100달러에 포도를 파십시오” 관리인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여인은 다시 200달러를 제시했습니다. 관리인은 화를 벌컥 내며 이 여인을 궁궐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멀리서 광경을 보고 있던 공주가 슬피 울고 있는 여인을 불렀습니다. “여인이여, 당신은 지금 큰 실수를 했습니다. 이 포도의 주인은 이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장사꾼이 아닙니다. 그분은 포도를 팔지 않고 그냥 주신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허락된 죄사함의 은혜, 용서의 은혜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기에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저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이 은혜와 사랑을 받았으니 한 주간도, 교우 여러분의 매일의 삶이 ‘회개’를 통한 하늘로부터 임하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죄 사함’의 큰 은혜 안에 거하는 삶이 되어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며, 상처 입은 심령이 힘을 얻고, 시기와 질투가 떠나고 그곳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열매가 가득한 참으로 아름답고 복된 새로움의 역사가 가득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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