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강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6:9)

 

  지난 3주간에 걸쳐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첫 부분들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1) 하늘에 계신-하나님의 초월성과 거룩성, 그리고 창조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그 어떤 피조물도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하나님의 속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말씀드렸죠. 2) 우리 아버지-아빠 아버지,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우리 곁에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아닌 우리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부터는 기도의 중심 내용으로 들어가 살펴보려고 합니다. 앞서 살펴본 주기도문의 구조에서 6개의 청원 기도가 있는데, 앞의 3개는 당신으로 시작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요, 뒤의 3개는 우리로 시작하는 기도라고 말씀드렸죠. 6개의 청원 기도 가운데 오늘 본문은 첫 번째 청원 기도에 해당하는데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이미 주기도문 강해를 통해서 나눈 것처럼, 유대 관행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는 곧바로 그 이름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찬양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인데요. 여러분에게도 소개해드렸던 카디쉬 기도문에도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이처럼, ‘이름이라는 것은, 그 이름을 가진 존재의 됨됨이를 표현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이름이란 말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단어인데요. 3:13-14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은 곧 하나님 자신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이름이 곧 를 의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영광을 받으시길 원한다는 기도입니다

  이 말을 3주간 나눈 말씀에 빗대어 표현해 본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초월성이 인정되고,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월성, 거룩이란 말의 원래 뜻은 윤리적 개념이 아니라 물리적 개념입니다. 쉽게 말하면, 피조물과는 다른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을 나타낼 때 거룩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피조물과 다른 존재라는 물리적 개념에서 윤리적 개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조금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성경을 일일이 손으로 써야 했습니다. 이것을 필사라고 하는데요. 성경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거룩히 여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 필사하다가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이들은 먼저 한 박자 쉬고 들어갑니다. 본래 히브리어로 하나님은 야훼인데, 그 발음을 직접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요,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야훼라는 말(발음) 대신에 아도나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아도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필사하던 사람들은 아도나이야훼를 의미하는 것인 줄 알고 필사를 했습니다. 2) 그러면 바로 필사를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라는 글자를 쓰기 전, 반드시 먼저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목욕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정결함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하나님이라는 글자를 쓸 때면, ‘새 붓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오경을 쓸 때만 해도 무려 6,080자루의 붓이 필요했다고 합니다(모세오경에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무려 6,080번 등장한다는 말이죠!!). 3) 가죽에 필사할 때 문제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파피루스라고 하는 갈대 줄기와 같은 것을 말려서 거기에 필사를 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짐승의 가죽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라는 거룩하신 이름을 기록할 때 사용되는 가죽은 아무런 가죽이 아니었습니다. 고통을 당하면서 죽은 짐승의 가죽, 그러니까 의도적인 죽음을 당한 짐승의 가죽은 불경한 것으로 여겨져 그런 가죽에는 필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죽은 짐승의 가죽을 사용했는데, 문제는 그런 짐승 가운데 송아지 가죽만을 사용했다는 것이죠. 그렇게 송아지 가죽에 성경을 필사했는데 모세오경에 사용된 송아지 가죽만 약 60마리라고 하니, 요즘처럼 백신이나 각종 약품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가능했지, 요즘 같았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했습니다.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거룩이라는 물리적 개념에서 도출된 윤리적 개념의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하는데요. 바로 십계명의 제3계명 때문입니다. 20: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여러분~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근거로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이에요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그런 기도를 하라고 하세요. 그것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가장 첫 부분에서 말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라는 말일까요? 아닙니다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에는 더욱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두 가지 정도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먼저 이 말을 쉬운 말로 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오며입니다. 그래요! 여러분~ 아주 간단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우리 주님의 또 다른 기도에서도 볼 수 있는데요.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종려주일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하신 말씀) 그래요! 여러분,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 예로, 출애굽기 40장을 보면 성막이 완공되어 하나님께 봉헌할 때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40: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이렇게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을 드러내시는 분이심을 성경이 증언합니다. 정리하면, 이러한 기도를 드리는, 영광을 드러내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드러내시라는 기원이 담겨있는 기도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을 드러내시는 분이시지만, 그 영광이 충만하길 기원하는 기도를 우리가 해야 한다는 것을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주기도문을 통해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2. 세상의 만물을 통하여 또한 성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길 간구함 / 여러분! 가끔씩 산이나 또는 풍광이 참 좋은 곳을 가면 대부분의 성도는 ~~~~ 우리 하나님! 참 멋지시네.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만드셨네라고 하면서 감탄을 합니다. 봄의 핀 꽃을 보면서, 여름의 진한 녹색을 보면서, 가을의 단풍을 보면서, 겨울의 설경을 보면서, 비행기를 타고 창공에서 내려다보면서, 바다에서... 그렇죠? 달리 표현하자면, 인간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스스로 나타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과 같은 피조물을 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간은 그렇지 못해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음에도 인간은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의 삶으로 이 기도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를 간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 마을에 아주 예의바르고 착한 봉수라는 아이가 살았습니다. 봉수는 늘 어른들에게 인사도 잘하고 어려운 노인들도 잘 돌봐 드리는 착한 아이였던 것이죠. 이런 경우, 사람들은 그 아이도 칭찬하지만 또 누구를 칭찬할까요? 그래요! 그의 아버지를 칭찬합니다. 그뿐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를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아버지를 부를 때도 봉수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마을에 또 다른 아이가 살고 있습니다. 이름은 봉팔입니다. 그런데 봉팔이는 항상 제멋대로 행동합니다. 어른들에게 인사도 안 해요. 어르신들이 무거운 것을 들고 가도 모른 척합니다. 심지어 남의 물건에까지 손을 댑니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당연히 그 아이를 욕하지요. 그런데 또 누구를 욕할까요? 그래요! 그 아버지까지 욕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그 아버지를 봉팔 애비라고 부릅니다. 왜요? 무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길 원하신다는 간구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며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3.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거룩한 삶이란, 1) 창조주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성전이 거룩하다는 말은 성전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처럼, 우리가 거룩해진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요, 하나님께 속한 자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잊지 않는 자라는 말입니다. 2)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로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말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의 초월자 되심을 나타내는 것이고(영광을 나타내심), 하나님의 거룩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생명에 대한 경외심으로 나타납니다. 조금 전, 봉수라는 아이처럼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곳에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모습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생명을 경시하는 사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사회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42/ 곡식을 사러 온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 앞에 섰을 때 벌벌 떱니다. 그때 요셉이 뭐라고 합니까? 42:18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이 생명에 대한 경외로 나타납니다. 1/ 히브리 사람들의 아들들이 태어나면 다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산파 십브라와 부아가 이 명령을 거역합니다. 이유가 뭐죠? 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로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명령을 거역한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모습입니까? 봉수의 삶처럼, 여러분의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찬양하고, 높이는 일이 일어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을 배려하는 생명을 향한 경외심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 있어 타의추종을 불허한다던 그 옛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셨던 우리 주님의 음성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그 어떤 피조물도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지난 주 말씀처럼, ‘명품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며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며, 높이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한 주간도 주님과의 아름다운 동행의 삶을 사는 여러분의 손길과 발 길이 머무는 곳마다 생명이 살고, 번성케 되며, 치유와 회복의 은혜가 가득하며, 때마다 열매를 맺는 참으로 물 댄 동산의 아름다운 축복의 현장으로 변화되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참으로 멋진 역사가 끝없이 펼쳐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