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 본절에서 기생충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을 거머리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거머리는 피를 빨아 먹고 사는 생물이지만, 남의 것을 빨아먹는 사람을 의미할 수도 있고, 끝없는 인간의 탐욕을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계속해서 남의 피를 빨아 먹고도 족한 줄 모르는 거머리는 탐욕으로 끝없이 남의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의 상징으로 적합합니다. ‘두 딸’은 거머리에게 붙어있는 강한 흡인력을 가진 두 개의 흡입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짐승들은 배가 부르면 더 이상 다른 짐승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어서 남의 것을 착취하고도 만족할 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절제력을 상실한 사람은 탐욕의 노예가 되어서, 끝없이 남의 것을 탈취하다가 발각이 되어 수치와 멸망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께 절제의 힘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 3-4가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자는 인생과 자연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 끝없는 인간의 탐욕을 상징하는 것들을 찾아냈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언급한 ‘스올’은 종종 ‘무덤’으로 번역되는 말로 ‘지옥’을 의미합니다. 지옥은 죽은 자를 삼키고 또 삼켜도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르고 계속해서 더 많은 생명을 요구합니다. 그가 두 번째 제시한 ‘아이 배지 못하는 태’는 끝없이 아이를 가지기 원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더욱 더 강렬한 소원을 갖게 됩니다. 그가 세 번째로 제시한 ‘물로 채울 수 없는 땅’은 아무리 많은 물을 부어도 모두 다 삼켜버리고 계속해서 더 많은 물을 요구합니다. 마지막에 제시된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도 아무리 많은 것을 태워도 계속해서 더 많은 땔감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인간의 끝없는 탐심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자가 여기에서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서 탐욕을 묘사하고 있는 것은, 만족할 줄 모르고 계속해서 더 요구하는 인간의 욕심의 위험함을 지적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욕심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이러한 욕망을 갖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 안에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영원한 구멍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만드시고 영원한 삶을 주시는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만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 안에는 그 어느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큰 구멍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왜 자기 안에 이러한 큰 구멍이 생겼는지 알지 못한 채 세상을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이 구멍을 채워 보려고 세상의 모든 보물들을 찾아다닙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과 명예를 통해서, 어떤 사람은 부와 지식을 통해서, 그리고 어떤 사람은 남녀 간의 사랑을 통해서 이 구멍을 채워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일시적으로 우리 마음을 채워 주기는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완전한 만족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창조주 하나님을 대신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는 길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기업으로 삼고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만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고 만족함이 있습니다. 허전하고 비어있는 우리의 심령을 말씀으로 채우고 기도로 채우고 찬양으로 채우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때마다 순간마다 채워 주시는 주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온전히 누리시는 귀하고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