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강해

  내 삶의 사명! (9계명) 20:16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끊임없이 말을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자녀들이 말을 배우며, 말을 통해 서로 소통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그러면, ‘이란 무엇일까요?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음성 기호나 문자 기호로 나타나는 사고의 표현 수단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사람에게 말(언어)이라는 도구를 주셔서 상호관계를 맺도록 하셨습니다. ‘사회성을 갖도록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여, 어떤 물건을 가리키거나 사건을 묘사하도록 하셨고, 말을 통해 사람 사이에 관계를 맺고 세상을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사람이 타락할 때 말로써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실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는 거짓이 생겨나게 되었고, 말이 가진 힘으로 이웃에게 해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에서 네 이웃에 대하여(against)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제9계명은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이 진실해야 하고, 말로 이웃을 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거짓 증거는 히브리어로 에드 솨케르인데요. ‘에드라는 단어는 다시 말하다’, ‘증언하다는 의미로 법정에서 증언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제 9계명은 다른 계명과 조금 다른 면이 있는데, 이 계명이 지켜져야 할 상황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법정입니다. 그런데 그 법정에 섰을 때, ‘솨케르로 증언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솨케르나쁘게 행동하다’, 또는 거짓말하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근거 없이 하는 말이나 행위를 가리킬 때 쓰는 단어입니다. ,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증언하거나 거짓말로 증언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거짓 증거에 대한 명령은 네 이웃에 대하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네 이웃을 해하려고혹은 네 이웃을 향하여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거짓 증거를 금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계명은 원래 재판과 관련된 계명입니다. 당시 재판에서 증인의 역할이 컸습니다. 지금처럼 과학 수사 등의 힘을 이용할 수 없었던 시대이다 보니 더욱 그러했겠지요. 19:15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당시 재판은 두 명의 증인만 있으면 그 죄가 성립되었으며, 그 죄로 인해 다른 사람의 목숨까지도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에 대하여 증거 한다는 것은 생명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공정한 재판을 하도록 끊임없이 요구하시고 명령하시는 것을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악한지, 종종 이웃에 대해, 또는 이웃을 위해 거짓말로 증언하는 이들이 있었고, 이들은 심각한 죄악을 저지를 뿐만 아니라 사람을 상해하는 일들까지 서슴지 않고 자행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은 많은 토지와 밭을 이미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유독 나봇의 포도원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조상 대대로 물려 받은 자신의 유업을 지키려는 나봇은 포도원을 왕에게 넘기지 않겠다고 했고, 이에 아합은 드러눕습니다. 이를 지켜본 아내 이세벨은 나봇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앗을 계획을 세웁니다. 바로 이 계획에 거짓증거가 동원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상 21:8~10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을 치고 봉하여 그의 성읍에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내니 그 편지 사연에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에 높이 앉힌 후에 불량자 두 사람을 그의 앞에 마주 앉히고 그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라 하였더라.” 이렇게 나봇은 그에 대한 거짓 증거로 인해 억울한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합은 주인 없는 포도원을 차지하게 된 것이지요. 참으로 슬프고 참담하며 악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짓 증거에 대한 말씀은 신약에서도 예수님과 사도들이 언급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정한 재판을 명령하시지만, 인간의 죄로 인해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 하는 일이 많았고, 그로 인해 무고한 고난을 받거나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거짓 증거에 대해 아주 강하게 금지하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짓 증거를 금하신 이유에 대해 두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인간의 악함으로부터 의인들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19:16~20 “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어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고 말하면 그 논쟁하는 쌍방이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당시의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설 것이요 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하나님은 거짓 증언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한 행위대로 그대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을 옥에 가두려 했다면 그를 가둘 것이요, 그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했다면 그의 것을 빼앗고, 죽이려 했다면 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까닭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와 같은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019 검찰 연감을 보면, 2000년대 들어 형법상 위증죄로 기소된사람의 수가 연평균 1,676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법정에 선 증인이 오른손을 들고 외치는 형사소송법 제 1572항에 정해진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는 증인 선서가 무색할 지경입니다. 

  2019OECD 보고서에 따르면 회원국 37개국 가운데 사법 시스템 신뢰도를 측정한 결과 우리나라는 최하위를 기록하였는데 대법원에서는 조사결과를 수긍할 수 없다는 취지의 회신을 보냈다고 합니다. 위증죄로 기소된 사람의 통계를 놓고 보자면, 이는 하나도 놀라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도 법정에서는 수 없는 위증들이 난무하고 없는 증거들을 만들어내며, 있는 것을 감추는 등 인간의 악함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이런 악한 세상에 사는 수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재산을 빼앗기고, 옥에 갇히며, 피눈물을 쏟으며 밤새워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또한, 과거의 역사를 뒤돌아보자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까요?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잔혹함 속에서 선한 사람들의 생명이 보호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 하나님은 진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가 거짓 증거 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23: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없는 것을 말씀하지 않으시는 분으로서 그 성품은 진실하심과 성실하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에게 오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진실함을 삶의 양식으로 삼는 모습입니다. 진실하지 않은 것,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과는 반대인 바로 거짓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악이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서는 이런 말, 저기서는 다른 말, 말을 바꾸는 행위 등 이 모든 것이 거짓 증거입니다. 진실이 아닌 것으로 서류를 만들고 꾸미는 것도 죄악입니다. 없는 말을 만들어 다른 사람을 모함하는 것, 들은 말이 진실한 것인지 점검하지도 않고 말을 전하는 생각 없는 사람들도 악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진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 9계명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첫째, 진실한 말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인간의 죄악 된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28~32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인간의 말 가운데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와 수군거림과 비방이 죄라고 말씀합니다. 악독은 사람을 해하고자 악한 상황으로 사람을 밀어 넣는 성향으로 계획적으로 남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군수군하는 자, 은밀하게 남을 헐뜯는 자를 말합니다. 특히 사업하는 사람들은 경쟁 업체의 수군거림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는 일이 허다합니다.(찌라시) 수군수군하는 자가 비공개적으로 남을 악하게 말하는 자라면, ‘비방하는 자는 공개적으로 남을 악평하는 자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악한 목적으로 험담하는 것이고, 진실이 아닌 것으로 비방하여 사람의 생명을 허물어 버리는 사탄과 같습니다. 솔로몬은 25:18을 통해 거짓 증거 하는 사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 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이니라.” 거짓된 말은 방망이로 사람을 쓰러트리고, 날카로운 칼과 독이 묻은 화살로 생명을 저격하는 것이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말이 혹여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거나 생명을 상하게 하지 않았는지 우리는 항상 내가 뱉은 말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진실이 아닌 것을 즐겨듣는 자 역시도 거짓말하는 자와 같음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생명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인간의 혀를 칼과 양약에 비유합니다. 12:18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입술의 모든 말과 마음의 묵상이 오직 하나님께 상달 되어 하늘로부터 임하는 은혜를 먹고 마시는 은혜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을 통해 생명이 살기를 원하십니다. 창조 때부터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이지요. 바꿔 말하면, 생명이 풍성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의 입술을 통해 생명이 살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통해 약한 자를 돕고 위로하는 양약과 같은 입술의 말로 생명을 살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언어에는 네 종류가 있다고 하지요. 입술의 말과 머리의 말과 가슴의 말과 영혼의 말이 그것입니다. 첫 번째, 입술의 말은 마음에는 없는 입술로만 하는 말입니다. 방송에서 안내하는 멘트나 큰 식당의 입구에서 종업원들이 하는 형식적인 인사와 같은 종류의 말입니다. 이런 말은 상대방의 느낌이나 기분은 생각하지 않고 주어진 멘트로만 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는 못합니다.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언어이기에 공기만 진동시킬 뿐,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지요. 두 번째, 머리의 말입니다. 지식의 말, 정보를 전달하는 언어를 말합니다.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뉴스나 온라인 등으로 하는 강의와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세 번째, 가슴의 말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말, 공감하는 말입니다. ‘기쁘다, 슬프다, 화난다, 무섭다등과 같은 말입니다. 이런 느낌을 표현함으로써 참다운 대화가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네 번째, 영혼의 말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언어입니다. 바로 사람을 변화시키고 치유하는 힘과 능력이 담긴 언어입니다. 미국의 훌륭한 목사와 교사들을 조사해 본 결과 이들은 한결같이 영혼의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영혼의 언어는 입술을 통해서도 말하지만, 눈과 손과 몸으로 하는 몸의 언어를 통해서 더 많이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진지한 자세로 가까이 가가가 힘 있게 악수하면서 상대방의 눈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모습이 상대방을 감동시키고 변화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실한 말과 생명의 말을 삶으로 사셨던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생명의 말로 수많은 영혼을 살리셨지요.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게 따뜻한 눈길과 몸의 언어로 그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어린아이를 안으시고 축복하셨지요. 그 외에도 수많은 각종 병든 이들의 환부를 만지시고 생명의 언어로 수많은 영혼을 치유하시고 살리셨습니다. “달리다 굼”, “에바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렇게 우리 주님은 생명의 말과 진실한 말로 사람을 살리고, 영혼을 치유하고 회복시키셔서, 이들로 주님의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도록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그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의 진실함과 생명 살리는 말이 이제 우리의 삶이 되어 우리의 입술을 통해 아골 골짜기와 같은 세상에 생명의 부활을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입술을 통해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성령의 능력으로 죽어가는 영혼이 다시 살아나고, 살 소망을 얻으며,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끝없이 펼쳐지는 물 댄 동산의 풍성함과 윤택함이 온 땅을 덮는 놀라운 은혜가 가득하게 되어 여러분의 가정과 이웃이 살고, 세상이 변화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