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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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계명 /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합니다(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이 동일하게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또 공동체의 어른은 공경 받아야 하며, 그 분들은 삶의 연륜으로 아랫사람들을 잘 훈계하고 본을 보여야 합니다.

 

  오늘 나누는 계명은 제6계명으로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이전의 계명과 차이점은 어떤 부연설명도 하지 않고 무조건적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다른 계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6계명은 죽이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 계명은 죽이지 말아야 할 대상, 즉 무엇을 죽이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6계명을 히브리어 원문에 좀더 가깝게 번역하려면 그냥 “죽이지 말라”로 번역해야 할 것입니다. 한글 성경은 “살인”(殺人)하지 말라고 번역을 해 놓았는데, “살인”이라는 말은 죽이다(殺)라는 동사와 사람(人)이라는 목적어가 합쳐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한글 번역은 “사람”이라는 대상을 명시적으로 덧붙여 놓았습니다. 그런데 죽이지 말라는 계명을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으로 이해하는 것은 몇 가지 이유에서 바람직합니다. 첫째, 5계명과 7-10계명들은 모두 분명히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계명들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6계명도 이웃과의 관계에 관한 명령으로 이해한다면, 당연히 6계명은 무엇보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으로 이해됩니다.

 

  1.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성경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라는 것인데,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① 지정의 – 하나님의 대리자로 이 땅을 다스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과의 관계 – 하나님께 예배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③ 사람과의 관계 – 책임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지위, 출신, 성별로 인하여 존귀함이 나누어지거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누구이든지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21:18-19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을 만나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나니 /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였다 하라” 이 본문에서 한 사람은 임금인 아합이며 다른 한 사람은 일반 백성인 나봇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반 백성의 죽음에 대하여 그것을 행한 왕인 아합에게 죄를 물으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움 받았기 때문입니다. ‘칼뱅’은 말합니다 “인간을 짓밟고 압제하고 죽이는 것은 곧 하나님을 짓밟고 압제하고 죽이는 것이다”. 창세기 9:6에서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제6계명은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라”를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6계명을 따라 이웃을 죽이거나 해하지 않는 것은 물론 마음 속으로 미워하고 분노하고 저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노는 마음 속으로 살인을 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요한일서 3:15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 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합니다. 산상설교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6계명을 재해석하시면서 형제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5:21-22). 창세기 4장의 가인의 예에서 보듯이 분노는 실제 살인으로 이어집니다. 성경 말씀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생명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은 고귀함을 강조합니다. 그러기에 그 생명을 함부로 취하는 것은 생명의 고귀함에 위배되는 행위입니다. 특히 인간의 생명을 취하는 것은 생명존중이 위배되는 일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인간의 악함을 아시고 생명존중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3. 살인과 살생의 문제입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모든 생명은 고귀합니다. 시편104편 10-12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 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 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 시편104편 24-25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 거기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는 생물 곧 크고 작은 동물들이 무수하니이다” 시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아름답다는 것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생명이 고귀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모든 살생을 금하지는 않습니다. ① 식물을 주심 창세기1: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② 동물을 주심 창세기 9:2-3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성경말씀은 살생을 금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에게 육식을 허락하셨습니다. 사실 인간이 육식을 통하여 얻어야 하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가지 조건을 주십니다. 창세기9:4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그 이유는 “피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결국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뿐이심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4. 살인하지 말라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①고의적인 살인 금지 ②과실치사 조심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에 사용된 원어가 ‘라차흐’인데 이것은 고의적인 살인을 금하는 것으로, 전쟁에서 사람을 죽일 때나, 혹은 하나님의 허락하셔서 사람을 죽이는 경우에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전쟁에서의 살인 / 하나님께 죄지은 자를 징계하는 자는 살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는 불법적인 살인 혹은 고의적인 살인에 대한 것입니다. 고의적인 살인이란 미워하는 마음을 절제하지 못하고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 까지 이르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단어는 사람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사람의 생명을 상하게 한 경우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의 법은 과실로 인해 사람의 생명을 상해한 경우에도 죄가 없다고 하지 않으십니다(민수기 35장 - 도피성 제도 – 과실치사도 죄로 인정하는 것). 십계명의 제6계명은 여섯 글자의 짧은 명령이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한자어로 생명(生命)은 ‘살라’는 명령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 것을 명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셨습니다. 홍수가 세상을 휩쓸고 간 땅에 남겨진 노아와 그의 가족을 향해서도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웃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이웃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미워하는 것까지도 살인이라고 규정합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 살인이라고 하고, 음욕만 품어도 간음한도 합니다.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하면 말씀에 대한 미세한 순종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계명을 대할 때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생각은 우리의 힘으로 도무지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이 계명을 우리가 온전히 지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증오심이 일어나고 분노로 가득찰 때,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얼마나 절실한 기도인지 모릅니다. 사랑은커녕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 악을 이길 힘이 없어 이 말씀 앞에 불순종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우리의 실제 삶에서 필요한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적극적 사랑을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 가운데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마땅한 반응은 하나님이 사랑하신 사람을 나도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마침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그 주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생명은 또한 ‘살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십계명을 어길 수 있습니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고 해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준수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엄동설한에 입힐 옷이 있는데도 어떤 사람을 벌거벗겨 내쫓는다면 그가 얼어 죽도록 방치한 것입니다. 사람이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고도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면 그가 굶어 죽도록 방조한 것입니다. 그들이 죽을 때 그들의 피가 우리 손에 묻게 될 것이다.  

 

  어느 대학교의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사내는 알코올 중독자로 가구를 내다 팔아 술을 마시고, 술 마실 돈이 없으면 아내를 두들겨 팬다. 거기다가 아내는 폐결핵에 걸려 콜록거린다. 셋방살이 형편에 임신을 했다. 이 임신된 태아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학생 한 명이 재빠르게 손을 들고 일어서서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낙태시켜야 합니다.” 교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금방 베토벤을 죽였네!”  따라서 생명에 대한 존중은 더 이상 사람이 굶어 죽거나 버림받아 죽지 않고 질병이나 재해로 죽지 않는 그런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라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연과 생태계를 보호하고 보존하는 노력까지 확대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이유를 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이 말씀 속에 우리 삶의 목표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신답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답게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구원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