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겸비(兼備)’라는 말도 하나의 덕목이 되는 시대이다. ‘겸비’는 두 가지 이상을 아울러 갖추었다는 뜻으로 소위 말해서 두루두루 갖추었다는 말이다. 왜 오늘날 우리에게 이것이 필요한 것일까? 세상을 보는 눈이 너무 편협하기 때문이다. 한쪽으로만 일방적으로 치우친 눈으로는 세상을 바로 볼 수가 없다. 이런 생각들은 비단 세상을 바라보는 좁은 시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적 사고와 가치관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마디로 성(聖)과 속(俗)을 너무 편협하게 구분하려는 경향이 많다. 물론 성속은 분명히 존재하는 영역이 있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이원화된 생각과 시선이 세상과 교회를 편 가르기 하고 소통부재의 세상을 만들고 있다.
옛날 선임부목사 시절, 인근의 어느 교회 목사님이 음향장비를 빌리러 왔는데 이분이 택시를 타고 그 무거운 장비를 운반하시겠다는 것이다. 마침 교회 마당에 승합차가 있어서 교회 승합차에 장비를 옮겨 싣고 함께 동역하는 전도사님으로 하여금 그 목사님 교회까지 다녀올 수 있도록 대동시켰다. 가는 길은 그 목사님이 직접 운전하고 갔지만 문제는 돌아오는 길이었다. 혼자 승합차를 운전해오던 전도사님이 알고 보니 초보운전이었던 것이다. 30분도 안 되는 거리를 무려 두 시간이 넘게 걸려 돌고 돌아서 왔다고 한다. 당시에는 거의 대부분의 차량이 스틱기어 차량이라 혹 언덕에서 차가 뒤로 밀리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언덕만 보이면 무조건 피했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그러했겠는가? 우리나라는 초보운전자가 자기가 초보라는 사실을 차 뒤편에 광고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그 중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세 시간째 오직 직진 중” 이라는 문구였다. 이렇듯 초보운전자의 특징은 오직 직진만 할 줄 안다는 것이다. 백미러를 보고 룸미러를 통해 다른 차를 살피는 일이 초보운전자에겐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미숙한 운전자처럼 미성숙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생각하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나 혹은 판단을 무시하고 오직 자기만 옳다고 여긴다. 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조화와 겸비’의 사고를 가졌다는 것이다. 내 생각만 일방적으로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말과 세상의 이야기에도 충분히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열린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게만, 혹은 특정 부류에만 인정받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모두에게 환영받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적대적 감정을 품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에게 필요한 ‘겸비의 덕목’이다. 우리 주변을 보면 흔히 교회는 잘 다니고 신앙생활은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세상에서 좋은 평판을 못 받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종교학자 마르시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그의 저서 ‘성과 속’에서 나무나 돌과 같은 지극히 비종교적인 것에 신성한 것이 깃들면, 그것에 사람들이 종교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초월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고 지적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세속적인 것 속에서도 성스러움의 시선과 가치로 바라볼 줄 아는 넓은 미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수많은 사고와 가치들이 서로 혼재된 세상이다. 그만큼 다양성이 공존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이 다양성의 시대에 무조건적으로 내 것만 주장하는 닫힌 사고로는 다른 사람을 품을 수도 없고 성숙한 관계도 맺어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갖고 있는 중심이 흔들려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중심을 지키면서도 다른 것을 두루두루 살필 줄 아는 지혜, 그리고 모든 관계 속에서 존중받을만한 인격과 넓은 식견을 갖추는 것 또한 겸비의 사람이 가져야 할 이 시대의 덕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