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대왕의 33세 요절로 헬라제국은 그의 부하들에 의해 분할된다. 그 가운데 유대 땅은 프톨레미 왕조의 온건한 통치 하에 놓였다가, 그 뒤를 이은 셀루쿠스 왕조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게 된다. 셀루쿠스의 안티오쿠스는 유대인의 율법과 제사 행위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식민 통치 강화를 위한 문화 말살 정책 하에 유대인들의 모든 절기와 행사들을 금지시키고 폐기시켰다. 이런 가운데 유대인의 여호와 모독과 자신들의 제우스 경배를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다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돼지피를 뿌리고 성전을 모독하면서 유대 신앙을 경멸하고 조롱하기도 했다. 이런 작태에 흥분했던 많은 유대인들이 여러 모양으로 저항했지만 안티오쿠스의 강력한 군대 앞에 무기력하기만 했다. 이런 가운데 제사장 가문의 한 인물이 등장하여 조직적으로 독립군을 규합하는데 그가 바로 ‘마카비’였다. 이 마카비라는 인물로 시작된 조직적인 독립전쟁은 그의 아들 유다 마카비와 손자 요나단 마카비로 이어지다 BC 165년, 마침내 요나단 마카비의 동생 시몬 마카비에 의해 독립을 쟁취한다. BC198년부터 165년까지 33년간의 지루한 전쟁 끝에 승리한 마카비 일가는 하스몬 왕조를 세우고, 예루살렘은 100여년의 긴 평화에 들어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시몬 마카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예루살렘은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을 것이고, 주민들은 크고 멋진 말을 타고 위엄 있게 행진해오는 당당한 개선장군 앞에 겉옷을 던져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을 열렬히 외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평화도 잠시, BC 68년 로마의 침공으로 유대 땅은 다시 식민지로 전락하여 총독과 그들의 앞잡이 이두메 사람 헤롯의 통치 하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다윗과 하스몬 왕조의 영광을 되찾을 강력한 군주, 곧 메시야를 기대했다. 그리고 이런 가운데 기대할만한 인물이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갈릴리 나사렛 사람 예수님이었다. 기대주로 세인(世人)의 관심을 한 몸에 받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려고 할 때는 바로 이런 때였다. 유대인들의 머릿속에는 과거 다윗과 하스몬 왕조의 영광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기억과 기대는 전부 다 예수님께로 향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만왕의 왕, 만유의 주로 오셨지만, 세상의 권세자로 오신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로마와 헤롯 왕조를 몰아내고 다윗과 하스몬 왕조의 영광을 재현할 강력한 권세자를 원하고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방법대로 낮고 낮은 겸손의 왕으로 오셨을 따름이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이런 까닭에 교회력(敎會曆)의 고난주간의 상징은 ‘종려나무’가 아니라 ‘나귀’에 있어야 할 것이다. 종려나무 가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부산물에 불과하다. ‘종려주일’이 아니라 ‘나귀주일’이 되는 것이 더 적확(的確)하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말을 탄 위엄 있는 군왕의 모습이 아닌 나귀를 탄 겸손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처럼 ‘겸손의 왕’, ‘섬김의 왕’으로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방법을 세상에 드러내셨지만, 군중은 자기 생각과 다른 주님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실망했다.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던 손으로 손가락질과 주먹질을 하고, 호산나를 외치던 입으로 저주하고 욕하면서 십자가 처형을 외쳤다. “저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려라!” 이 장면을 상상할 때 이런 생각이 든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이 어쩜 저렇게까지 돌변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이 과연 그때 그 사람들만의 모습일까?
세상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도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겸손과 섬김의 나귀를 타야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생명력을 상실한 까닭은 우리 안에 겸손과 섬김의 정신을 잃어버린 까닭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섬김과 겸손의 생명력을 상실할 때 교회는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 이기적인 내 뜻과 욕망의 종려나무 가지를 버리고, ‘나귀 타고 오신 왕’을 겸손히 뒤따를 때 거기에 능력이 있고, 진정한 승리가 있고, 부활이 있고, 영광이 있다.
칼럼
2017.09.15 13:47
나귀 타고 오신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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