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2017.09.15 13:38

어느 것이 옳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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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말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그의 말이 아니란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반대 세력들이 파 놓은 함정에 걸려들었을 때 거기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명백하게 부당한 처벌이었지만 ‘법을 지키는 것이 시민의 도리’라는 신념으로 자신을 빼내려는 제자들의 탈출극에도 응하지 않았다. 평소 법과 질서를 강조했던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불리하다 해서 스스로 법을 떠나는 것도 정당한 것은 아니라며 담담하게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마지막 죽음 앞에서까지 성인군자 행세하는 그 소크라테스를 반대자들이 비꼬는 뜻으로 ‘악법도 법이다’라고 했던 말인데, 소크라테스의 말로 세상에 퍼져버렸다. 소크라테스는 ‘법 질서에 대한 자기 도리’ 곧 ‘자기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4대 성인의 한 사람으로 거명되는 인물답게 소크라테스의 의지적 행동에는 분명 교훈적 메시지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자기 신념을 지기키 위해 목숨을 던졌다고 해서 그의 판단과 행동을 잘한 일로만 보는 것이 과연 옳은가?
  신라의 화랑에 ‘세속오계(世俗五戒)’라는 다섯 가지 계율이 있다. ‘사군이총(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이 다섯 가지 계율은 화랑의 신념이요 법이요 도리였다. 어린 화랑들은 이 세속오계로 철저하게 무장되었는데, 정신무장하면 화랑 ‘관창’을 빼놓을 수 없다.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의 좌장군 ‘품일’은 아들 ‘관창’에게 지금이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는 때임을 강조하며 용맹스럽게 나가 싸울 것을 독려한다. 그래서 어린 관창은 임전무퇴의 결사 각오로 적진에 뛰어든다. 참으로 가상한 용기였다. 비록 계백 장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지만, ‘임전무퇴’를 외치며 적진에 뛰어든 관창의 용기는 위축된 신라군을 감탄시켜 황산벌 전투를 대승으로 이끄는 승리의 도화선이 되지 않았던가! 참으로 숭고한 죽음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럴지라도 화랑들은 겨우 십대에 불과한 어린 소년들인데, 그들을 신념과 계율로 무장시켜 생명을 던지게 하는 행위를 숭고하게만 보는 것이 과연 옳은가?
  신라 화랑들에게 세속오계가 있었다면,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있다. 임전무퇴 정신에 따라 목숨을 던졌던 화랑 관창 못지않게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진다. 특별히 안식일 법에 대한 정통 유대인들의 준수(遵守)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유대 마카비 시대에 있었던 광야 전투는 안식일 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준법정신이 얼마나 투철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당시 로마의 안티우쿠스 장군은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유대 땅을 점령했다. 그런 다음 안티오쿠스는 유대인들에게 몹쓸 짓을 행했는데, 예루살렘 성전에 우상을 가져다 놓고 경배하게 하고, 돼지 피를 성전 제단에 뿌리고, 또 유대인들이 경멸하는 돼지고지를 강제로 먹이는 등 모멸감을 주며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이에 ‘망치’라는 별명을 가진 유다 자손 ‘마카비’를 중심으로 민중봉기가 일어났는데, 초기에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위업까지 달성하며 승승장구 했다가 강력한 로마의 군사력에 밀려 결국에는 광야로 쫓겨나고 말았다. 안티오쿠스는 그들을 소탕하기 위해서 군사들을 보냈지만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유대 민중 봉기군을 제압할 수 없었다. 고심하던 끝에 안티오쿠스는 유대인들이 안식일에는 전투조차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른 바 안식일 법이었다. 이윽고 안티오쿠스는 안식일에 전 군대를 동원하여 광야를 급습했고, 유대인들은 정말로 아무런 반격도 하지 않은 채 죽어갔다. 외경 마카베오서는 그때 죽어가던 유대인들의 외침을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말하기를 우리가 무지하게 죽자 하늘과 땅이 우리를 위하여 너희들이 불법으로 우리들을 죽였다고 증언해줄 것이다.” 얼마나 투철한 정신인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생명이요, 삶 자체였다. 특별히 안식일 법을 지키는데 있어서는 나라가 망해도 그 법을 지키는 것이 더 가치가 있는 것이고, 목숨을 잃어도 그 법을 지키는 것이 더 영광된 것이고, 처자식들이 무참하게 죽어가도 그 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을 존중하는 진정한 하나님 경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연 그들의 투철한 율법 준수의 모습을 잘하는 것으로, 옳은 것으로 여기실까?
  소크라테스의 의지적 신념이나 화랑 관창의 결연한 투혼,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투철한 정신, 모두 다 좋다. 곱씹을수록 참으로 훌륭하고 멋지며 놀랄 정도로 근사하다. 그러나 그 모습들이 아무리 교훈적이고 숭고하고 때로 근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더라도 개인의 신념이나 계율, 법 조문 자체가 어떤 경우에도 절대시 되거나 사람의 생명보다 앞서서는 안 된다. 왜 그런가? 그것이 기준이 되고 절대시 되는 순간, 생명을 억압하고 해치는 흉기로 돌변하는 까닭이다. 유대인들이 그랬다. 유대인들은 율법 조문 자체를 절대시하고 그것을 투철하게 지키는 것이 하나님 경외라고 착각했다. 그 순간 율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억압하고 생명을 해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게다가 본질을 상실한 껍데기 외형적 신앙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했다. 유대인들의 신앙이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그들 가운데 계셨다. 예수님은 긍휼과 사랑을 상실한 유대인들의 잘못된 외형적 신앙에 경종을 울리시기 위해 일부러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시고, 배고픔에 안식일 음식규정을 어긴 자들도 변호해주셨다. 본질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보라고 보란 듯이 행하신 일들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돌발적인 예수님의 행동에 분개한 유대인들이 안식일 법을 내세우며 기세 등등 따지고 들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아무 사랑도 긍휼도 없는 외식주의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