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학교에서는 체벌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체벌에 대한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해 지금도 논란이 아주 다분합니다. 어느 흉악한 살인범이 사형집행 직전 자기 어머니를 만나더니 마지막 인사를 한다면서 그 어머니의 혀를 깨물어 버립니다. 사람들은 이 같은 사형수의 돌발적인 행동에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형수는 자신의 인생이 이처럼 비참하게 끝난 것이 바로 어머니의 혀 때문이라면서 마구 울부짖는 겁니다. 어릴 적 자기가 친구의 색연필을 훔쳐왔을 때 그냥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내버려두었던 어머니는 점점 더 큰 잘못을 했을 때에도 전혀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았는데 그 잘못된 습관이 점점 자라서 결국에는 자기가 사형수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 같은 아들의 하소연에 그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하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물론 자신의 잘못을 어머니에게 전가시키는 못된 짓이라고 나무라는 분도 계시겠지만 부모는 자녀의 잘못에 대해 사랑의 징계를 해야 할 책임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따라서 부모는 아이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계해야 합니다. 그 훈계가 아이들에게는 인생의 닻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안정감을 심어주게 되는 겁니다.
1. 하나님의 징계는 사랑이다.
모양과 방법의 차이는 있겠지만 징계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경험해야할 신앙의 통과의례와도 같습니다. 사실, ‘징계’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이 단어가 주는 뉘앙스는 굉장히 사무적이고 딱딱한 느낌입니다. ‘징계’라는 단어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그 안에 ‘정’도 없고 ‘사랑’도 없이 그냥 잘못한 댓가의 형벌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는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2절에도 이르기를 하나님은 오직 사랑하는 자에게 이 징계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치 아버지가 자식에게 하듯 깊은 사랑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징계와 하나님의 징계를 구분할 수 있는 핵심입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한결 같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모습이 때로는 따뜻한 포옹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따끔하게 혼내는 야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모습이든지 그 중심에는 자식을 향한 부모의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 너머에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징계와 심판은 차이가 있습니다. 징계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입니다. 하지만, 깨닫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아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2. 하나님의 징계는 과거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채찍이다.
우리가 징계를 받으면서도 감사해야할 이유는 이 징계가 단순히 우리의 잘못에 대한 정죄와 심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징계는 과거 잘못에 대한 형벌의 개념을 넘어서 미래의 더 성숙한 삶을 위한 하나님의 독려이고 채찍입니다. 세상에서의 형벌은 과거에 대한 질책만 있을 뿐, 다시 회개하고 개선해서 변화되게 하기 위한 조치는 없습니다. 최근에는 교도소 내에서 갱신하고 변화 될 수 있도록 많은 갱신프로그램이 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냥 죄를 지었기 때문에 가둬놓는다는 개념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다보니 출소를 해도 다시 재범, 삼범......계속해서 범법자의 꼬리를 떼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는 분명한 목적성이 있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이제 다시는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더 성숙한 삶을 위한 교육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스런 징계의 시간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고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는 징계를 거부하지 않는다.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징계가 너무도 당연한 일인 줄 알기 때문에 조급한 마음을 가지거나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참고 기다립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무엇이라 했습니까?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옳다 인정하심을 받을 때까지 참으면 시험을 이기는 승리자가 될 뿐 아니라 그 결과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는 축복을 받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한심스러운 일은 자신이 분명히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징계를 받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징계 인줄 인정하지 않고 어쩌다 우연히 그런 일이 자기 생애에 온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그냥 회피하고 할 수만 있다면 벗어나고자 한사코 거부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도 모른다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징계 안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저들은 징계를 그냥 자신의 인생에 재수 없는 한 날 정도로 여기게 됩니다.
어느날 위대한 부흥사였던 무디에게 한 교인이 찾아와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아무리 범죄를 저질러도 하나님은 저를 그대로 놔두시데요. 그러니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디는 그 부인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부인! 부인은 지금 부인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군요!" 부인이 되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는데요" 그러자 무디는 다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징계는 오직 사랑하는 자에게, 아비가 아들에게 하듯 부모의 심정으로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이 사실만 우리가 분명하게 알고 있다면 우리에게 감사하지 않은 날이 없고 이기지 못할 시험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 신답 성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잠언서
2017.09.14 10:12
징계의 가치(3장 11절-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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