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콜 중독, 약물 중독은 누구나 다 중대한 문제로 취급하면서 심각성도 알리고 치료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 반면, 일에만 매달려 사는 ‘일 중독자들’은 방관한다. ‘일 중독’도 중독인데, 알콜 중독이나 약물 중독처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단순히 재밌는 표현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일까? 오히려 수당이나 승진이라는 당근을 주며 일 중독자들을 더욱 채근하는 실정이다. 일 중독에 빠져 잠시도 일을 멈출 줄 모르고 한가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비극인데,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불행히도 이 비극 속에 살아간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그렇고 사회 분위기가 그렇다. 오늘 우리 사회는 ‘한가함’을 ‘무능’이나 ‘게으름’ 혹은 ‘죄’와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다. 한가함을 나쁜 시각으로만 보는 것이다. 한가한 시간을 가지면 일단 부정적 시각으로 보며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고 죄를 짓는 것처럼, 놀기나 좋아하고 게으른 사람처럼 취급한다. 그러면서도 ‘분주함’, ‘바쁨’ 이런 것들은 또 무조건 옳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항상 분주하게 다니고 바쁘게 일에 빠져 있는 것을 잘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잘 살아가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한가함’은 즐길 줄 모르고 ‘일만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다 보면 반드시 삶의 깊이가 떨어지고, 인생의 질이 떨어지는 까닭이다.
중세 시대 수도사들이나 가톨릭교회의 신부들은 한가함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한가함을 매우 요구하신다고 믿는 사람들처럼 한가한 시간을 갖고 보내기 위한 노력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기’ 한번 해보라. 식은 죽 먹기처럼 생각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런가 하면 수도사들이나 신부들은 육체 노동을 통해서도 한가함에 들어가는 훈련을 했다. 자급자족을 위한 텃밭 노동이기도 했지만 육체 노동 속에서도 한가로움의 영성 훈련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한가함 속에 들어가는 법을 터득하여 한가할 때에만 얻을 수 있는 깊이를 삶에 더하고 존재의 변화를 꾀했던 것이다. 머리가 바쁜 사람들, 마음이 바쁜 사람들, 몸이 바쁜 사람들은 모두 한가하지 못해 인생 본연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누가 한가하고 싶지 않아서 한가할 줄 몰라서 한가한 시간을 갖지 않는 줄 아느냐며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 한가할 줄 아는 사람, 한가함의 영성을 소유한 사람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심히 분주하고 고된 상황 속에서도 한가함을 누릴 수 있다.
한가로움의 영성을 얻기 위해서는 인식부터 달리해야 한다. 한가로운 시간을 갖는 것도 다른 바쁜 일들 못지않게 중요하고 필요한 일로 인식하는 것이다. 어쩌면 더 중요하고 꼭 필요한 일이며, 결코 우순 순위에서 밀릴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 빈 마음에만 한가로움이 생기고 빈 마음으로만 한가로움을 누릴 수 있는 까닭이다. 오늘 한가로움의 귀함을 모르고 터부시하기만 하면 언젠가 한가한 시간들이 주어졌을 때는 정작 한가로움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때 가면 한가로움 속에 있는 인생의 신비들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전혀 느껴지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지금 분주하게 하는 일을 잠시 멈추고 한번 여유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아무리 바쁜 중에라도 한가롭기 위해 시간을 비워보면 어떨까? 한가로움 속에 가만히 있어보면 더 좋은 스케줄로 살 수 있고, 해야 할 일 목록이 반으로 줄어들지도 모른다. 빨래를 하든, 잡초를 뽑든, 무슨 일을 하든 일상의 아무리 분주한 중에라도 한가한 시간을 갖을 때 그 한가함 속에서 삶의 진리들을 터득하게 되고 더 깊은 존재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한가로움의 영성이 주는 능력이다.
“한가함은 하나님의 놀이방이다”라는 말이 있다. 참으로 훌륭한 통찰이다. 한가로움의 영성을 얻기 위하여 마음을 비우고 놀이방에 한번 들어가 보자. 더 나은 삶을 위하여 행복하고 거룩한 삶을 위하여 한가함의 학교, 하나님의 놀이방에 들어갈 때 세상의 바쁜 물결에만 휩쓸리지 않고 고요하게 주시는 평화의 세계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