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2017.09.15 13:35

금이 간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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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람이 양 어깨에 막대기로 만든 지게를 지고 물을 날랐다.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의 항아리가 달린 지게였는데, 그 중 왼쪽 항아리는 금이 간 항아리였다. 물을 가득 채워서 출발했지만, 집에 오면 왼쪽 항아리의 물은 항상 반쯤 비어있었다. 금이 갔기 때문이다. 반면에 오른쪽 항아리는 물이 가득 찬 모습 그대로였다. 왼쪽 항아리는 주인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매번 이야기한다.
  “주인님, 나 때문에 항상 일을 두 번씩 하는 것 같아서 죄송해요. 나처럼 금이 간 항아리는 버리고 새것으로 쓰세요.”
  주인이 금이 간 항아리에게 말했습니다.
  “나도 네가 금이 간 항아리라는 것을 안단다. 네가 금이 간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바꾸지 않은 거란다. 우리가 지나온 길 양쪽을 바라보겠니? 오른쪽에는 아무 생명도 자라지 않는 황무지이지만, 왼쪽에는 아름다운 꽃과 풀이 무성하게 자리지 않니? 너는 금이 갔지만, 너로 인해서 많은 생명이 자라나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니? 나는 그 생명들을 사랑한단다.”
  많은 사람들이 완벽함을 추구한다. 그래서 자신의 금이 간 모습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어떤 때는 자신을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겨 낙심에 빠질 때도 있다. 그런데 세상이 삭막하게 되는 것은 금이 간 인생들 때문이 아니라 너무 완벽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은 아닐까? 내가 금이 가지 않은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기에 누군가에게도 그런 금이 가지 않은 완벽한 삶을 요구할 때가 있다. 그런 요구가 상대방을 힘들게 만들고 주저앉게 만듦에도 불구하고 늘 높고 완벽한 수준을 요구한다. 명문대 출신의 부모님을 둔 한 학생이 있었다. 부모의 완벽함 때문에 그 아들은 병들어 가고 있었다. 2등을 해도 만족이 없었다. 심지어 1등을 해도 전교 1등을 해야 한다고 다그쳤다. 그 아이의 마음은 점점 차가워지고 메말라가며 자신감을 잃어갔다.
  영국 의회에 어떤 초선 의원이 있었다. 의회에서 연설을 하는데, 청산유수로 너무나도 완벽한 연설을 했다. 그는 연설을 마치고 난 다음, 윈스턴 처칠에게 다가가서 자신의 연설에 대해 평가를 좀 해달라고 청했다. 그런데 실은 연설의 대가인 처칠로부터 ‘탁월한 연설이었다’라는 평가와 칭찬을 내심 기대하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윈스턴 처칠은 의외의 대답을 했다. “다음부터는 좀 더듬거리게나!”
  너무 완벽한 사람은 타인에게 의도하지 않은 거리감을 느끼게 하기도 하고, 때로 인간미 없는 싸늘함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래서 똑똑한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세상을 황무지로 만들 때가 많다. 그게 과연 똑똑한 것일까? 한 방울의 물도 떨어뜨리지 않는 완벽한 항아리는 자주 주위를 황무지로 만든다. 탁월함이란 완벽함이 아니다. 비록 연약하고 부족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 안에 담긴 참된 생명력을 전달하는 것이 진정한 탁월함이다. 금이 간 항아리들 때문에 생명이 충만한 세상이면 좋겠다. 금이 간 항아리처럼 자신도 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품어줄 줄 아는 세상이면 좋겠다. 금이 갔어도, 좀 부족해도 괜찮다. 바로 그가 세상을 풍요롭게 하고 사람을 살리는 좋은 이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은 금이 간 항아리들에 의해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져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