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5 17:25

비판의 세가지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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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수도자가 개울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개울가에는 자신을 건네주기를 바라는 한 젊은 여인이 서 있었습니다. 한 수도자는 여인을 못 본채 하고 개울을 건너가 버렸고, 다른 수도자는 여인에게 등을 들이밀며 업히지요 건네 드리겠습니다.”하고는 개울을 건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러자 여인을 업지 않았던 수도자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보게 수도하는 몸으로 여인의 몸에 손을 대다니 자네는 부끄럽지도 않은가?” 여인은 업었던 수도자는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러자 더욱 화가 나서 동료 수도사를 나무랐습니다. “자네는 단순히 그 여인이 개울을 건널 수 있게 도왔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겠지, 하지만 여인을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우리의 신성한 계율임을 잊었는가?” 그 수도자는 계속해서 질책을 퍼부었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입을 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나는 벌써 두어 시간 전에 그 여인을 개울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자네는 아직도 업고 있군 그래

 

  요즘은 우리사회는 서로에 대한 비판의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에 대한 비판 그리고 코로나이후 한국교회 비판이 더욱 거세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장소 중심주의가 나은 결과"라고 말합니다. 한국교회가 교회론에 대한 잘못된 신학적 지식으로 인해 `공동체` 자체보다는 `모이는 장소`를 중시하면서 현장예배를 고수하면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젊은이들의 좌절을 이해하고 감싸안지 못하여, 수많은 청년들이 신천지 이단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우리교회는 어떠한가요? 교회는 사람이 모이는 곳이기에 사람만 모이는 것이 아니고 입이 모여 있기에 비판하는 일에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사실 이런 비판에 지혜롭지 못하면, 악풀 댓글에 자살하는 연예인들과 같이 죽음을 가져 올수도 있는 파괴력이 비판에 숨어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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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좋은 비판이 있습니다. 좋은 비판은 생명을 살리는 선한의도의 비판입니다. 생명의 길에서 벗어난 길을 걷고 있는 사람에게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회개를 선포합니다. 다윗왕은 밧세바를 통해 범죄한 후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즉각적이면서 긍정적인 반응으로 회개합니다. 따라서 좋은 비판은 회개함으로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되돌려 줍니다. 그러므로 좋은 비판의 동역자들이 필요합니다. 온전한 신앙인으로 서기 위해서는 동조자 보다는 좋은 비판자가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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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나쁜 비판이 있습니다. 이는 비난이라고 말합니다. 이 경우는 선하지 않은 의도와 왜곡된 목적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비판을 말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난후 여인들이 뛰놀며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이 말에 사울왕은 불쾌하며 심히 노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나쁜 비난을 받는 사람의 마음은 죽음과 한걸음 사이에 서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나쁜 비난을 이기는 힘은 무엇입니까? 악한 비난, 나쁜 비판은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극복의 방법은 바로 하늘에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께 묻고 맡기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자신에 쏟아지는 아픔과 절망까지도 주님 앞에 올려 보내시면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평화가 찾아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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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무식한 비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세와 아론을 비판하며 원망합니다.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는게 낫다고 소리쳤습니다. 종에서 영원히 해방시키며 생명의 땅으로 가는 여정에 이런 비판을 합니다. 이런 것이 생각 없는 비난이며, 무식한 비난입니다. 일의 앞뒤를 모르고 그냥 눈앞의 일만을 바라보고, 성령의 인도하심에는 상관없이 자신의 순간적인 판단에만 의지하여 하는 비난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이들의 무지한 비난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무지한 사람들의 무식한 비난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때 십자가에 주님이 하신 말씀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주님께서는 오히려 용서를 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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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은 어떤 비판을 하고 있으며, 어떤 비판에 직면하여 있습니까? 교회가 왜 이런 비판들이 있어야 하느냐고 비판하지도 말고, 교회는 비판은 있으되 좋은 비판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좋은 비판을 선하게 받아들이는 성도가 많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쁜 비판은 우리 안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나쁜 비판의 통로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혹여 나쁜 비판이 여러분 앞에 있다면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시라! 무식한 비판을 만났거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라! 정말로 그들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혹여 여러분이 그 입술로 무식한 비판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