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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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교회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 이야기는 성경적 신앙과 삶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한다.
아마도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성경적인 신앙과 삶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1. 양반과 상놈이라는 신분차, 봉건적 유교문화를 뛰어넘어 헌신과 섬김의 본을 보여준 김제 금산교회를 설립한 조덕삼 장로(1867-1919)와 이자익 목사(1879-1958)의 이야기다.

 
2. 조덕삼 장로는 이 지역 용화마을의 유지였고, 이자익 목사는 그의 집에서 마부로 일하던 머슴이였다. 두 사람은 어떻게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교회를 세웠을까?

 
3. 1904년 봄 말을타고 전주에서 정읍을 왕래하며 복음을 전하던 테이트(한국명 최의덕 1862-1929)선교사는 중간 지점인 용화마을에 머물곤 했다. 그는 당시 사교(邪敎)의 고장이던 금산에 교회를 세우고 싶었다.

 
4. 그날도 용화마을의 제일가는 부자였던 조덕삼의 집 마방에 말을 맡기고 하루밤을 묵었다.오랫동안 테이트 선교사를 지켜봐온 조덕삼은 "그렇게 살기좋은 당신의 나라를 포기하고 이 가난한 조선땅에 왜 왔는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테이트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때문입니다" 라고 화답했다. 유교정신에 투철한 보수집안의 조덕삼은 헌신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 테이트 선교사의 용기에 감동하였고, 이후 사랑채를 내어 예배를 보도록 했다. 이것이 금산교회의 출발이다.

 
5. 경남 남해에서 태어난 이자익은 17세 때 조덕삼을 만났다. 6세때 부모를 잃고 소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이자익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고향인 남해를 떠나 걸어걸어 금산까지 왔다. 첫눈에 이자익의 영특함을 알아본 조덕삼은 그를 마방의 마부로 일하도록 했다.

 
6. 무학의 이자익은 고개 너머로 배운 천자문을 줄줄 외웠다. 그 모습을 지켜본 조덕삼은 비록 자신이 부리는 머슴이지만 아들(조영호)과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신앙생활도 같이 했다.

 
7. 조덕삼과 이자익이 함께 믿음을 키운지 3년이 지난 1907년 금산교회는 장로 장립투표를 했다. 묘하게도 두 사람이 후보에 올랐다. 신분의 양극화가 뚜렷했던 그 시절 주인과 머슴이 경쟁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투표결과는 놀라웠다. 이자익이 주인을 누르고 장로로 선출된 것이다. 술렁이는 성도들을 향해 조덕삼이 겸손히 말했다.

 
8. "우리 금산교회 성도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는 이자익 영수(장로보다 낮은 직분으로 교회의 살림과 행정, 설교를 맡아서 함)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그를 뽑아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9. 이자익은 장로가 된뒤 테이트 선교사를 대신해 교회 강단에서 설교했고 조덕삼은 교회바닥에 끓어 앉아 그의 말씀을 들었다. 집에서는 이자익이 조덕삼을 주인으로 성실히 섬겼다. 조덕삼은 자신의 머슴을 장로로 섬겼을 뿐만 아니라 그가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 할 수 있도록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조덕삼은 그로부터 3년 뒤 비로소 장로가 됐다.

 
10. 이자익은 주인의 배려로 훗날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가 되어 1915년 금산교회 2대 목사로 부임했다. 당시 조덕삼은 이자익을 담임목사로 청빙하고자 적극 나섰다. 조덕삼은 이자익을 정성으로 섬겼고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자익 역시 사랑으로 성도들을 돌봤고, 교단에서 세번씩이나 총회장을 지내는 한국교회사의 거목으로 이름을 알렸다.


조덕삼 장로가 보여준 것, 바로 그것이 교회의 능력이다. 교회는 유유상종으로 모이는 곳이 아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 화합이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 되는 능력, 이것이 교회의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