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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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 세상을 떠나신 소설가 박완서씨의 책 중에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이 있었다.
이 책은 남편과 사별한지 1년이 채 안되어 소중한 외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이때 북받쳐 오른 참담함과 슬픔을 일기 형식으로 쓴 소설이다. 1남 4녀의 자녀들 중 막내였던 아들은 정말 소중한 아들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소중한 아들이 하는 짓마다 얼마나 기특한지, 어머니의 속을 한 번도 썩이지 않았고, 공부도 잘해서 서울대 의대생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아들이 1988년, 26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이 세상을 떠났다.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일일 것이다. 박완서씨는 그때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매일 미친 사람처럼 통곡하며 하루하루를 지낸다. 천주교 신자였던 그녀는 하나님께 항의도 해보고, 불펴도 해보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데굴데굴 구르며 하나님께 덤비며 울부짖는다.

"왜 내 아들을 그토록 일찍 데려가셨는지 '한 말씀'만 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 수도원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의 마음이 조금씩 치유가 되더란다. 그 곳의 봉사자들이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고, 죽어가는 노인들의 똥, 오줌을 치워내는 모습을 보는데, 그들의 표정이 힘들기는 커녕 너무나도 기쁜 얼굴을 하고 있었단다. 어떤 어려움과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고작 자기자신만을 위해서 따지고 있는 모습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이때까지 자기 핏줄만 사랑하던 모습, 지극히 이해관계에 따른 사랑만 하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왜 하필 내 아들을 데려 가셨습니까?"라는 생각이 "내 아들이라고 해서 데려가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을까요?"라는 기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들을 잃기 전까지 기고만장하고 서슬 푸른 교만으로 가득찬 인생을 되돌아 보게 된다. 잘난 아들과 비교해서 남의 자식을 은근히 깔보고, 뇌성마비로 태어난 아이들을 보고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모진 생각을 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제 자식에 대해서는 '종교적 수준의 자랑과 사랑'을 품고 있었단다.


미안한 말이지만, 자식은 키우는 맛이라고들 한다. 키울 때 사랑스럽고, 키울 때 기쁘고, 키울 때 효도를 다 받는 다는 말이다. 다 키워논 다음에는 자기가 잘나서 알아서 컸다고 생각하고, 부모를 떠나면 더 이상 내 자식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자식을 나보다 높은 곳에, 또는 내가 이루지 못한 일들을 이루기 위한 위치에 두고 하나님처럼 대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지 않은가? 그야말로 '종교적인 수준의 사랑'을 품고 자녀를 대하고, 또 자녀를 자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이 종교적인 수준의 사랑, 즉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랑이 무너져야 참 사랑을 볼 수 있다. 내 자식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도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무너져야 내 자식도 참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식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참 사랑으로 사랑하고, 자기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의 이기적인 사랑이 무너져야 한다.

이기적인 자녀 사랑은 이기적인 자녀를 만들 수 밖에 없다. 혼자밖에 살 수 없는 아이가 아니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아이,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오히려 자녀를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놔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