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할 때 만약 그가 한숨을 내쉰다면 그것은 아마 ‘고통스러운 것’이라거나 ‘불행이다’라는 무언의 대답임을 뜻할 것이다. 산다는 것 자체가 ‘아픔’이고 ‘상처’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에서 나오는 한숨일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최근 신문에 보니 하루에 43명 정도가 ‘자살’을 한다고 한다. 왜 그럴까? 사는 게 힘든 것이다. 고통스럽고 불행하기만한 삶을 더 사는 것이 의미 없어 끝내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어두운 선택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도움을 받지 못하고 절망 앞에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처지가 안타까울 뿐이다. 쓸쓸하게 죽음을 택했던 사람들을 놓고 차마 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지만, 정말 그 길밖에 없었을까?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이상적인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그리스도인의 이상적인 삶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삶이 아무리 힘들고 때로 아프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불행이 아니라 행복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고통과 죽음에서 끝나지 않고 부활하신 까닭이다. 영광스런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부활에 이르는 영광을 약속해주셨다. 그뿐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약속과 믿음 안에 있기에 행복한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리스도인의 이상적인 삶을 '행복'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재밌는 사건 하나가 있다. 이노센트4세 교황 시대 때에 아주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존경스런 분이 있다. 이 분이 교황 이노센트4세를 찾아갔을 때 교황이 그에게 자랑을 했다. “교회의 이 수많은 풍요로움을 보시오! 이제는 교회가 ‘은과 금이 없을지라도’라고 말하는 시대가 지나갔습니다.” 그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소리를 듣고 잠잠히 있다고 이렇게 말했다. “물론 맞습니다! 교회가 더 이상 가난하지 않습니다. 은과 금이 넘칩니다. 그러나 성전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되는 능력도 사라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결국 15세기의 신앙은 사치와 낭비, 방탕함이 교회 안에 넘쳐나게 되면서 암울한 시대가 되어 버린다. 암울하다는 것은 그 안에 진정한 행복이 없음을 뜻하는데, 교회가 물질로 가장 풍요롭게 된 그 시대가 영적 암흑기로 전락한 것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물질에 있지 않고 믿음에 달렸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행복은 물질이 아니라 믿음 안에 있다.
행복은 또 어디에 있을까? 사랑 안에 있다. 산다는 것을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사랑 안에 있는 행복을 얻기 위하여, 사랑하고 사랑하는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베풀고 나누며 섬길 줄 알아야 한다. 이해하고 용납하고 힘을 주는 말, 같은 말이라도 “수고 많았다!” 격려해주는 말속에, 사랑의 섬김과 나눔 속에 나와 그의 행복, 서로의 행복이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이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때로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녹록치 못한 물질적 환경 속에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행복할 수 있고 행복해야만 한다. 그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고, 오늘 나와 함께하시며,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숨’ 대신 ‘미소’를 띠라. 부활의 믿음과 사랑 안에 있으면 산다는 것은 행복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