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와 라면

by 양재천목사 posted Sep 1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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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떠나면 고생이다”라는 말이 있다. 지난 2주간의 성지순례를 통해서 그 말을 실감했다. 이른 아침부터 빡빡한 스케줄을 따라 바쁘게 움직이며 하루의 일정을 다 마치고 돌아오면 늦은 밤이다. 이튿날에도 새벽같이 나가서 늦게 들어오고, 은혜의 발자취를 밟아가는 것이 설레고 기쁘기도 했지만 계속되는 강행군 속에 고생스럽기도 했다. 고난이라면 고난의 길 같았다. 그런 가운데 또 하나 힘들었던 것은 먹는 문제였다.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는 것은 생각보다 고단한 일이었다. 다행이라면 우리에게는 준비해온 약간의 한국음식이 있었다. 특별히 김치는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매일 많은 양의 김치를 먹기 때문에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하는 김치 특유의 맛이 느껴졌고, 먼 나라 남의 땅에 와서 조금씩 아껴먹는 그 맛이란 지친 몸과 마음에 생명을 주는 것 같은 감동이었다. 그 감동을 혼자가 아니라 일행이 함께 나누니 감동이 더했다.
  한번은 일정 중에 종교개혁의 본산지인 스위스를 방문했을 때이다. 인트라 캔이라는 곳에 융 플라워라는 알프스의 한 봉우리가 있는데, 해발 3,454m의 고지(高地)였다. 참 높았다. 기차를 타고 올라가는데 저산소증으로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축 쳐지기 시작했다. 만년설 빙하의 그 아름다운 자연에 황홀하기도 했지만, 워낙 고지대이다 보니 구경하는 것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런데 아름다움과 어려움이 교차하는 그 현장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라면이었다. 세상에! 이런 높은 곳에서 라면을 팔고 있다니! 그것도 우리나라 신라면이었다. 물론 값은 좀 비쌌는데, 환산해보니까 10,000원 정도였다. 일행 중 한 분의 공궤(供饋)로 그날 우리 일행 18명은 알프스 융 플라워 정상에서 함께 라면을 먹었다. 평소에는 잘 먹지도 않던 라면인데, 피로에 지친 그 순간에 먹는 라면이란 정말 끝내줬다. 얼마나 맛있던지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어 치웠다. 그랬더니 기운이 나기 시작했다. 두통과 어지럼증도 사라지고, 행복함까지 느껴졌다. 김치에 이어 라면까지,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온 일행이 함께 먹었다는 것에 묘한 감격이 더했고, 김치와 라면을 먹었다기보다 생명을 함께 나눈 것과 같은 특별한 감동이었다. 우리 일행에게 ‘김치’와 ‘라면’은 단순한 김치, 단순한 라면 그 이상이었다. 그런데 대체 그게 뭘까?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절기인데, ‘유월’이란 ‘Pass over’, ‘넘어갔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자가 이집트의 모든 장자와 처음 난 것들을 다 죽일 때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랐던 히브리 사람들의 집은 그대로 넘어갔던 사건에서 따온 명칭이다. 가장 큰 명절인 이 유월절이 다가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안 구석구석에 있는 누룩을 제거하고, 출애굽 당시 선조들이 먹었던 양고기와 쓴나물과 무교병을 조촐하게 준비한다. 그리고 명절이 되면 온 가족이 그 만찬에 참여하는데, 가장의 집례에 따라 음식을 먹고 정해진 문답을 나누면서 그 먹는 것의 의미를 함께 새긴다. 과거 먼 타국에서 민족이 당했던 노예살이의 뼈아픈 고통을 잊지 않고, 동시에 그 고통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유월절 만찬에 함께 먹는 것을 통해 온 가족이 민족의 기운을 피부로 느끼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것, 여기서 나는 김치와 라면이 주었던 묘한 감동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김치와 라면은 먼 타국에서 지친 우리 한국인 일행에게 고향의 맛, 아니 그 이상, 생명을 주는 맛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순례자이다. 때가 되면 돌아갈 곳, 영원한 고향을 떠나와 먼 타국을 순례 중인 순례자이다. 이 순례 중, 지치고 피곤할 때, 어지럽고 온 몸이 축 늘어질 때 꼭 먹을 것이 있다. 하늘로부터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새 힘과 용기를 공급해주는 김치와 라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