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2017.09.15 13:46

진짜 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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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해 전에 인터넷에 떠돌던 기사인데, 집에서 소장하고 있던 유물을 감정단이 평가하고 가격까지 매겨주는 ‘TV 진품명품’이란 프로에 나왔다는 사람의 얘기였다. 이 출연자가 집안 대대로 소중하게 보관해 내려온 한문으로 된 문서 하나를 가지고 나왔는데, 유품에 매겨진 가격이 고작 8만 3천원이었다. 다양한 유품들이 몇 백만 원부터 몇 천만 원의 가격이 매겨지고 많게는 1억 이상 나가는 유품도 나오는 그 프로에서 감정 결과는 기대를 완전 깨는 것이었고, 소장자는 크게 실망했다. 그런데 실망이 문제가 아니고, 그 문서가 ‘노비문서’였다는 뜻밖의 사실이 문제였다. 한마디로 출연자의 조상이 노비였던 것이다. 인터넷을 달궜던 기사와 댓글들은 바로 이에 관한 얘기들이었다.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참 한신한 사람이다.”, “이제 방송에서 얼굴이 다 팔렸으니 한국 땅에서 얼굴은 어떻게 들고 다닐까?” 등의 악플들이 마구 달렸다. 그런데 정작 더 놀라운 사실은 이 기사가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TV 진품명품에 그런 사람이 출연한 적도 없고 방영된 적도 없었다. 어떻게 된 것인가 하면, 발단은 한 코미디 프로에 있었다. 거기서 재미로 만들어낸 얘기가 사실로 둔갑된 것이다. 사건의 실제 여부를 떠나서 이 해프닝은 생각할 점을 준다. 이제 가상의 인물이 되어버렸지만, 어쨌든 회자된 내용대로 한 출연자의 조상들이 노비였다고 치자. 물론 자랑스러운 것은 못 될 것이다. 그렇다고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그 정도로 부끄러운 일인가? 물론 뜻밖의 사실에 개인 성향에 따라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이 노예 사회도 아니고 신분제 사회도 아닌 때에 불필요하고 지나친 악플까지 달면서 많은 사람들이 부끄러운 쪽으로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과거 뼈아픈 인류역사로부터 그릇 자리잡아온 불합리한 사회적 편견의 미성숙한 산물은 아닐까?
  사람은 누구에게나 편견이 있다. 이 편견은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것, 배운 지식을 통해서 신념처럼 자리 잡는 것이다. 이런 편견이 있는 곳마다 늘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을 수밖에 없다. 때로 뼈아픈 역사의 가슴 아픈 편견들은 곳곳에서 개인과 공동체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내고 대립과 분열, 혼란을 초래하기도 한다. 과연 조상이 노비였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얼굴도 못 들게 됐다고 말할 만큼 조롱 아닌 조롱과 비난을 쏟아낼 수 있는가? 이것이 당연한가?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양반, 상전, 상놈, 종 따지던 태고(太古)적 사실에 민감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양반 가문들은 스스로 자랑스러워하고, 그렇지 못한 가문의 사람들은 부끄러움 속에 얼굴을 잘 들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한번은 어느 결혼식 주례사에서 이 결혼은 너무너무 좋은 결혼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이유는 신랑이 안동 권씨, 신부는 그 유명한 광산 김씨인데, 양반 가문끼리 만났기 때문에 너무 좋은 결혼이라는 것이다. 듣기 좋으라고 분위기 살리려는 말이었을 것이다. 양가 어른들의 기분이 우쭐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런 내용으로 분위기를 살려야 하는 뒤떨어진 사회적 분위기가 나로서는 달갑지 않았다. 조상이 양반이었다는 거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 삶의 평가는 전혀 되지 못한다. 게다가 사실, 양반 가문이라는 것도 조금만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웃기는 일이 많았다. 조선 시대 양반제도는 처음에 10% 안팎, 적게는 5% 내외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영조 시대 이후에는 25%가 양반이고, 조선 말기 철종 시대에 오면 양반이 무려 50% 이상으로 증가하게 된다. 오늘날 만인이 법 앞에서 평등했던 것처럼 본래 사회는 그랬다. 그런데 사회가 신분이라는 허상에 사로잡혀 사회적 편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모양인 된 것뿐이다. 그렇다면 양반 조상을 둔 사람이나 상놈, 혹은 종이나 노예 조상을 둔 사람 사이에 오늘 숨 쉬고 생각하고 자기 성숙을 이루어가는 진정한 가치를 좇는 일에 무슨 유별(有別)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 당시에도 신분이 중요한 시대였다. 주인이 있었고, 종이 있었다. 그때도 사람 편견의 시절이었다. 그런 시대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파격적인 말씀을 던지셨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나 지금이나 양반은 생명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이다. 이 사람만 진짜 양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