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2017.09.15 13:44

절제의 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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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인화학교 청각장애 아동들에 대한 성폭행 사건을 다루고 있는 ‘도가니’는 차마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범죄였다. 극악무도한 짓이었다는 말밖에, 할 말을 잃게 하는 파렴치한 사건에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고 분노했다.
  소설가 공지영 씨는 광주 인화학교의 파렴치한 범죄행위를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하면서 소설의 제목을 ‘도가니’라 했다. ‘도가니’는, 1) 쇠붙이를 녹이는 그릇, 2) 흥분이나 감격 따위로 들끓는 상태, 3) 무릎뼈를 속되게 일컫는 말 등의 사전적 의미를 가지는데, 소설은 물론 두 번째 뜻을 담고 있다.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느꼈을 감정, 분노심으로 들끓었던 기분을 이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범죄 현장 자체가 분노심을 들끓게 하는 도가니요, 그 현장을 목격한다면 누구라도 끓어오르는 ‘분노의 도가니’가 안 될 수 없다는 의도가 아니겠는가! 소설은 영화로 만들어졌고, 인면수심의 파렴치한 범죄는 소설과 영화를 타고 사람들의 가슴을 분노의 도가니로 들끓게 했다. “차마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는 사람들부터, “이 모든 내용이 다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고 토로하는 사람들, 그들의 반응은 차라리 ‘절제의 도가니’를 연상케 한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사악한 무리들을 척결해버리고픈 끓어오르는 분노심을 굳은 절제심이 아니고서야 저리도 유(柔)하게 표현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구역질이 날 지경’이라 한다. 모르긴 몰라도 구역질 날 역겨움을 제공한 것은 이 끔찍한 사건과 관련 있는 교회와 교인들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담은 ‘문제의 장면’ 때문임이 틀림없다. 문제의 교장은 교회 장로라는 자였고, 음흉한 교사들도 모두 다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이었다. 게다가 도를 훨씬 넘은 끔찍한 수위의 참혹한 실상을 눈치 채고서도 진상규명과 법의 심판 대신에 범죄의 실상을 깨끗이 덮으려고만 했던 자들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교인들이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세상 사람들이 발끈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문제의 장면은 교인들의 간절한 기도 장면인데, 그 기도의 내용인즉슨 사건이 무마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끔찍한 사건을 놓고 분노의 도가니가 된 사람들에게 구역질을 안겨준 건 한마디로 교회와 교인들의 어처구니없는 비상식적 행동 때문이었던 것이다. 장애를 안고 태어나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아이들, 보기에게 안쓰러운 그 어린 영혼들에게 세상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하나님의 마음은 짓밟힘과 학대를 당하는 그 어린 영혼들에게 온통 다 있는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들이 공포심에 떨었을 아이들의 아픔과 상처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고, 오직 내 교회 장로와 교인들 지켜줄 궁리만 했다는 그 처사가 과연 온당하고 건강한 상식의 행위인가? 기도할 가치가 아닌 것을 위하여 열혈 기도를 아끼지 않았던 문제의 교인들은 과연 제정신을 가진 교인들일까? 아니 그들이 교인들 맞을까? 그들의 기도는 대체 누구에게 한 기도였을까?
  광주 인화학교의 파렴치한 범죄자들이 철저히 회개하고 사람의 건강한 상식의 영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제발 교인이라,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입에 담기도 더러운 추잡한 욕망을 품고 죄를 저지른 그들은 겉만 사람처럼 보일뿐 추잡스런 욕망의 도가니들에 지나지 않는 까닭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이 모든 게 다 사실이 아니기를 가슴 조렸지만, 그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상황에서 이제 교회와 기독교인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끓어오르는 분노심으로 죄인들을 탓하기만 한들 부질없고 덧없다. 몸과 마음이 다치고 상할 대로 상했을 아이들이 잘 회복되기를 기도할 따름이며, 다만 세상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파렴치범들을 하나님과 교회에 너무 관련시키지 말길 바랄 뿐이다. 그 파렴치범들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무관한 자들이며,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심히 골치 아픈 대상이기 때문이다. 무릇 죄악으로 들끓는 사람의 마음은 ‘절제의 도가니’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