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추리소설 작가이면서 기독교사상가인 ‘도로시 세이어스’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 하나님은 세 번의 가장 치욕적인 일들을 경험하셨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일, 두 번째는 인간들에게 공개적인 모욕을 당하시고 처형되신 일, 세 번째는 교회의 타락과 부패로 인한 수치이다. 이와 같은 수치를 전혀 당하실 이유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수치를 받으시고 치욕을 경험하신 것은 세상과 피조물을 사랑하시어 구원을 베푸시기 위한 까닭이었다. 구원을 위한 모든 수치와 치욕, 하나님 밖에 감당하실 수 없고 스스로 자처하셨으니 어찌하랴! 하지만 도로시 세이어스의 마지막 지적처럼 교회의 타락과 부패로 인해 하나님께 돌아가는 수치는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깊이 반성해야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복음 전파를 위해 세워진 교회가 하나님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덕을 세워 선교적 사명을 다해야 할 교회가 부끄러운 일들을 행할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땅에 떨어지고 짓밟혔던가? 역사의 어제와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와 성도 개인의 부패로 당하신 불필요한 수치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묻지 않으실까? 그렇다면 깊이 반성하고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결코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은, 때로 교회가 덕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께 수치를 끼쳤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세우신 교회를 여전히 사랑하시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사랑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까닭이다. 문제 많고 탈도 많고 더딘 듯해도 하나님은 오늘도 교회를 통하여 일하신다. 가끔 아니 자주, 사람 냄새나는 교회는 연약하지만,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교회는 강하시기에 포기하지 않으시고 오늘도 교회를 통하여 위대한 일들을 이루시는 것이다. 때로 수치를 당하실망정 날마다 깨어 기도함으로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기다리는 교회와 성도를 하나님은 아끼신다. 하나님은 어쩜 그러실까? 역설적이게도, 성령 강림 속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부패와 타락으로 수치를 끼치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최고 대안이기 때문은 아닐까?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의 그리스도인들 각 개인에게 성령이 임하셨을 때 세워진 최초의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거룩한 사명감으로 불타는 교회였다. 성령의 임재와 뜨거운 감동하심 속에 날마다 깨어 기도하고 세상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한 일들을 아름답게 감당했다. 교회는 날로 흥왕했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의 수는 날로 늘었다. 성령이 임하신 교회와 성도들 때문에 세상이 새로워졌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존귀하게 높여졌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와 성도는 무슨 일을 행하고 있는가?
2000년 전 거룩한 성도들은 오직 성령 강림의 역사 속에서 믿음의 수고를 다하고, 죄악된 육체의 소욕을 쳐서 복종시키며,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자신은 물론 타인과 교회, 세상을 살렸다. 오늘도 그 성령 강림의 역사하심을 구해야 할 때가 아닐까? 그래야 성도가 살고 교회가 살고 세상이 살지 않을까? 성령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보혜사의 일, 중보자의 일, 위로자의 일, 조력자의 일이다.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성령은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탄식하시기까지 간구하신다. 실패하고 좌절하고 병들어 쓰러졌을 때 진정한 위로자로 오셔서 힘을 주시고 일으키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