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by 양재천목사 posted Sep 1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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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자주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무조건 틀렸다고 여기고 불편해한다. 심하면 적이나 원수로 간주하기까지 하는데,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하지 못하기 생기는 삶의 태도이다. 그런가 하면 잘못되고 틀렸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에게 몹시 배타적이고 공격적으로 대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인격적인 존중도 없고 관용도 없다. 함께 할 수 있고 하나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무모한 일인 것처럼 그저 등을 돌린 채 물리칠 기회만을 엿볼 때가 많다. 이런 모습들은 그 생각과 판단이 아무리 옳다 해도 좁은 가슴의 삶일 뿐이다. 좁은 가슴의 삶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어렵고 자주 또 다른, 더 큰 문제들을 양산한다. 그래서 넓은 가슴의 삶이 필요하다. 넓은 가슴만큼 세상과 사람을 품을 수 있는 까닭이다. 넓은 가슴의 삶은 오직 관용하고 이해하고 수용할 줄 아는 사랑과 기도의 삶이다. 기도와 사랑의 넓은 가슴의 삶이 세상을 새롭게 하고 풍요롭게 만든다.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전해진 정확한 때는 1885년 4월 5일이다.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기도와 사랑의 넓은 가슴을 가지고 같은 날 인천 제물포항으로 들어온 날이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그날 썼다는 기도문이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지켜주소서.
  오, 주여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는 조선사람 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란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사람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 관리들의 내심도 알 길이 없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싶기도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의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올 줄로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이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자신들과 우리 영혼이 하나임을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지켜주소서.

  선교사 언더우드의 기도문에서 한반도와 한민족을 품는 넓은 가슴이 보인다. 이 넓은 가슴은 어디에서 왔을까? 두말할 것도 없이 골고다 언덕 십자가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멸시 천대하고 침 뱉고 때리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 소리치던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참으로 넓은 가슴이다. 이 넓은 가슴의 사랑의 기도가 오늘도 세상을 품고 심령을 울린다.
  요즘에 보면 갈수록 공격적이고 냉정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가끔 청문회를 보더라도 그렇고. 선거철에 으레 보는 헐뜯기 정치공방을 봐도 그렇다. 상대방을 수용하는 모습, 관용하는 모습 없이 어찌 저리도 비신사적이고 공격적이고 냉정할까?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상처를 끌어안고 분노하고 미워하며 아파하고 있다. 복수의 칼을 품고 언제든지 기회만 오면 내가 받은 만큼 되갚아주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불태우는 사람들, 저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우리의 죄를 사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하는 한 사람이 아쉬운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