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있는 칼레(Calais)라는 작은 항구도시에서 유래되었습니다. 1347년, 영국과 프랑스는 100년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프랑스의 칼레 시민들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최후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도시 전체가 불타고 시민들이 모두 죽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칼레에서는 항복사절단을 보내 영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구하기로 했습니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전쟁으로 큰 손해를 보았다며 여섯 명의 전범자를 처형하는 것으로 전쟁을 종결하겠다고 말하고, 그 명단을 요구했습니다.
‘어느 누가 여섯 명 중 하나가 되기를 바라겠는가?’ 사절단이 협상결과를 발표하는 이때 용감하게 손을 들고 나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칼레의 최고 부자였던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였습니다.
“제가 시민들을 위해 죽겠습니다! 저는 칼레 시민들 덕분에 최고의 부자로 살았으니 칼레 시민들을 위해 죽겠습니다. 어느 누가 저와 같이 명예로운 죽음의 반열에 오르겠소?"
그러자 두 번째로 칼레 시장인 ‘장데르'가, 세번째는 부자 상인이었던 ‘피에르 드 위쌍’이 죽음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러자 위쌍의 아들이 이렇게 말하고 뒤를 이었다.
“아버지가 나서는데 아들이 어찌 살기를 바라겠는가”
4명의 자원자가 나서서 2명만 더 채우면 되는 상황인데, 시민지도자 세 명이 동시에 손을 들었습니다. 모두 일곱 명이 자원을 해서 오히려 한 명이 남게 된 것입니다. 제비뽑기로 한 명을 탈락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가장 먼저 손을 든 최고 갑부 ‘외스타슈’가 이를 반대했습니다.
“추첨을 하면 행운을 바라기 때문에 칼레 시민들을 위해 죽겠다는 아름다운 뜻이 변할 수도 있소. 그러니 내일 아침 가장 늦게 처형장에 나오는 사람을 빼도록 합시다. 밤새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겠소?”
모두가 외스타슈의 의견에 찬성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고통스러운 밤이 지나고 다음날 약속된 장소에 나타난 사람은 6명 뿐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죽음을 자원한 외스타슈가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궁금해 하면서 그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외스타슈는 아래와 같은 유서를 남겨놓은 채 이미 시체로 변해있었습니다.
“처형을 자원한 일곱 명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아서 비겁자의 오명을 쓰면 안되겠기에 제가 먼저 죽습니다. 먼저 하늘나라로 가서 그대들 여섯 명이 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외스타슈의 주검을 보고 결의를 새롭게 다진 여섯명의 자원자들은 영국왕의 요구대로 허름한 옷을 입고, 목에 밧줄을 걸고, 칼레시 성문의 열쇠를 들고, 영국 진영으로 맨발로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외스타슈의 죽음의 소식을 영국와 에드워드 3세의 왕비가 듣고 감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처형하게 되면 임신 중인 태아에게 불행이 닥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여섯 명 모두를 살려줄 것을 왕에게 간청했습니다. 결국 사랑하는 왕비의 요청을 받아들여 6명의 처형을 중단했하였고, 용기있는 한 사람의 죽음은 칼레 시민들뿐만 아니라, 같이 죽음을 자원했던 6명의 동료들까지 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소중한 생명을 던져 자신들의 삶의 터전, 칼레와 그 시민들의 생명을 구하려 했던 외스타슈와 6명의 귀족들의 용기와 책임감은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사회 지도층의 의식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이후 사람들은 ‘노블리스(귀족) 오블리주(의무)’의 유래를 칼레의 용감한 7명의 귀족들을 지목하였습니다.
오늘날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사회 지도층 인사나 조직의 리더들이 누리는 권세와 명예만큼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칼레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앞 다투어 목숨을 내어 놓았던 귀족들과 지도자들을 기리기 위해, 프랑스 정부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유래를 표상으로 만들어 후손들에게 영원히 전하려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로댕(Auguste Rodin)이 6년에 걸쳐 1889년에 완성한 조각 작품 ‘칼레의 시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