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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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앞에서 말한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17절이 위로부터 난 지혜의 속성을 친절하게 열거해주고 있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본 절의 말씀을 따라 위로부터 오는 지혜의 속성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성결합니다. ‘성결’이 무엇입니까? ‘성결’은 거룩하고 깨끗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 충분히 정결한 상태입니다. 그 중심에 악한 동기가 전혀 없고 순전한 것입니다. 악의가 없고 거룩하며 깨끗하고 착한 마음이 곧 위로부터 오는 지혜의 속성입니다. 내 생각과 마음속에, 내 삶 속에 이와 같은 성결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받은 자입니다.
  둘째로,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언제나 ‘화평’을 이룹니다. 화평은 화목한 상태 곧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서로 화목하고 그 가운데 평화가 있는 관계입니다. 반목과 불화, 불안은 서로 미워하며 죽이려는 적대적인 상태로서 결코 위로부터 오는 지혜의 속성이 아닙니다. 그런데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화평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화평을 이루기 위하여 헌신과 수고, 인내를 아끼지 않습니다. 내 안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 화평을 이루고, 하나님과도 화평한 상태로 들어가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까? 위로부터 오는 지혜로 충만한 상태입니다.
  셋째로, 위로부터 오는 지혜의 속성은 ‘관용’입니다. 만일 관용이 없다면 그것은 절대로 위로부터 오는 지혜가 아닙니다. 관용은 ‘법보다 앞서는 공정’입니다. 보다 폭넓게 용서하고 포용하려는 ‘차원 높은 선한 마음’입니다. 관용을 세련되게 표현한다면 ‘사랑과 공의가 조화를 이루어 융통성을 발휘하는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용이란 차원이 다른 지혜입니다. 이와 같은 관용이 있기 때문에 혹 잘못된 선택을 했던 영혼도 돌이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관용은 돌이켜 존재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넉넉한 지혜입니다.
  다음으로, ‘양순’입니다. 양순은 진리와 선한 뜻 앞에 언제라도 복종할 수 있는 자세입니다. 간청을 외면하지 않고 기쁘게 듣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설득 당하여 도우려는 마음, 그 마음이 ‘양순’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가 임하면 바로 ‘양순’의 마음이 생깁니다. 어떻게 ‘양순’의 자세로 진리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오만과 교만, 비열함과 악함이 없는 상태, 곧 지혜로운 상태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오만과 교만과 비열함과 악함은 위로부터 오는 지혜 곧 ‘양순’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는 언제나 얄팍한 수 노름이나 하는 존재에 불과한 까닭입니다.
  그 다음,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먼저 ‘긍휼’이란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에 대한 연민입니다. 그런데 연민과 동정만 가졌다고 해서 긍휼입니까? 무엇이 긍휼입니까? 긍휼은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행동으로 옮길 때 비로소 긍휼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연민을 가지고 상대를 위하여 헌신할 때 그 애틋한 사랑의 모습이 바로 긍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 받는 연약한 인간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긍휼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선한 열매’가 맺힙니다. 그래서 긍휼과 선한 열매는 언제나 진리의 길을 같이 다닙니다. 그 마음에 긍휼이 가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한 의의 열매를 맺으신 것은 참으로 하늘의 순리입니다.
  그렇다면 ‘편견’과 ‘거짓’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긍휼’과 ‘선한 열매’와 반대 개념입니다. ‘편견’은 전혀 긍휼이 없는 마음이고, ‘거짓’은 결코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부패한 마음입니다. 이를 테면 연약한 자를 보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보다 편견이 솟구칩니다. “그들이 저렇게 고통을 받는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다. 그들의 지혜 없음 때문이다. 멍청해서 저렇게 되었다.” 땅의 지혜, 정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은 이와 같은 편견으로 마음에 긍휼을 몰아냅니다. 그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 밭에는 결코 선한 열매가 자라지도 맺히지도 않습니다.
  18절 말씀은 17절에서 열거한 위로부터 난 지혜의 속성을 한마디로 압축하는 말씀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결국 화평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집약적으로 화평을 추구합니다. 그 지혜의 모든 것이 화평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의’이기 때문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든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화평'과 긴밀한 상관관계를 가집니다. 18절에서 ‘의의 열매’는 무엇을 뜻합니까? 위로부터 곧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를 따르는 자는 그래서 ‘화평’을 심고 의의 열매를 거둡니다. 서로가 불화하는 분위기에서는 좋은 것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화평이 없는 곳은 의의 나무와 열매가 자랄 수 없는 불모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누가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 지혜가 과연 위로부터 오는 지혜라면 성결한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화평을 이루어가는 모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관용할 줄 알아야 하고, 양순과 긍휼과 선한 열매가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의 삶 가운데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는 삶, 이것이 참다운 지혜를 얻은 자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