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소다 위에 식초를 부음 같으니라.” ‘마음이 상한 자’는 원문에는 ‘마음이 무거운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무거운 자는 근심으로 인해 낙심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낙심한 사람을 만나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낙심한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우해서 위로를 합니다. 낙심한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은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일입니다. 낙심한 사람들은 자기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을 때에 고통을 덜 느끼고, 용기를 얻어서 쉽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어리석은 말로 낙심한 사람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합니다. 그들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가서 흥겹게 노래를 부릅니다. 장례식장에서 슬픔에 빠진 유가족들 앞에서 즐겁게 웃고 큰 소리로 떠들며 노래를 부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음이 아프고 상처받은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 하고 위로하지 못 하는 이런 사람들은 오히려 마음이 상한 자를 더 아프게 고통스럽게 하는 무자비하고 어리석은 사람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소다 위에 식초를 부음 같으니라.” 했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 부르는 일은 추운 날에 옷을 벗는 것과 같다는 것은 추운 날에 옷도 변변히 입지 못하고 찬바람을 맞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시험에 떨어지거나, 또는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은 인생의 찬바람을 맞고 추위에 고통받는 사람과 같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이러한 사람에게 가서 자기 자랑을 하여 그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듭니다. 이러한 일은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그가 입은 옷을 벗기는 것과 같은 잔인한 일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소다 위에 식초를 붓는 것과 같습니다. 소다는 고대에 ‘천연탄산 소다’로 알려진 물질을 말합니다. 이 물질은 당시 동방에서 세척용, 시체의 방부제, 비누원료와 방습제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물질 위에 식초를 부으면 즉시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발효 효과가 나타납니다. 낙심한 자에게 자랑을 하거나 노래하는 것은 아픈 마음을 더 끓어오르게 만드는 악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한 자를 위로하되, 어려움을 당한 자의 입장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한 의도를 가지고 한 일이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위로하고 격려할 때에는 지혜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각도 말도 행동도 항상 신중하고 지혜롭게 하여 언제나 경우에 합당한 처신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해도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고, 고통 당하는 자를 위로하고, 낙심한 자에게 소망을 주어야 합니다.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실패한 자에게 용기와 힘을 더해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기적이다’, ‘배려심이 없다’, ‘사랑이 없다’, ‘무관심하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운 삶이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소외받고 고통당하고 병들었지만 의사에게 보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위로자가 되어 주셨고, 그들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섬김의 삶, 위로의 삶,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주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착한 행실이 이 세상의 빛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착한 행실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웃의 진정한 친구가 되는 복된 삶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