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믿음이 확인되는 때는 환난을 당할 때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환난을 만났을 때 반드시 취해야 할 태도는 낙담을 하거나 용기를 잃거나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낙담하는 것은 “네 힘이 미약함을 보이는 것”이라고 1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전능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전쟁터에서 반드시 승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되시고, 능력이 되시고, 반석이 되시고, 요새가 되시고, 내가 피할 산성이 되시고, 구원의 뿔이 되심을 인정하십시오. 그 하나님은 나를 환난 날에서 건져 주십니다.
전혀 죄가 없는 사람이 범죄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약 내가 그런 사람의 결백함을 증명할 수 있는 단서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그 사람을 위하여 ‘증인의 의무’를 다 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반대로 금품을 받고 위증하여 그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런 억울함을 당한 자들이 있으면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노력을 다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유대인의 관습 중에는 죄인을 사형장으로 끌고 갈 때 반드시 그 사형 행렬 앞에는 ‘외치는 자’가 있어 이렇게 소리를 지르며 앞서 갑니다. “누구든지 이 죄인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거나 이 죄인의 정상을 참작할 수 있는 것을 아는 자는 증언해 주십시오. 그러면 사형집행을 중지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록 원수 된 자가 억울하게 죽을 자리에 들어섰다고 하여도 그 사람에 대하여 무죄를 인정할만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원수를 위해서도 올바른 증언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생명을 걸고서라도 올바른 중언을 해야 합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바른 증언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혹시나 그에 따른 보복을 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기만 합니다. 증인석에 서야 함을 불편해 하고, 부담스러워만 합니다. 곤란함에 처해 있는 사람들의 속이 타 들어가는 마음을 헤아리려 하지 않습니다. 불의와 세상권력 앞에서 움츠려 들려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올바르게 말하고 증언하여 억울함에 처한 이들의 올무를 풀어주고, 범죄자는 그 죄값을 치르게 해야 합니다. 만약 알고 있으면서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모릅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변명을 하거나 위증을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머리털 수도 세신 바 되며, 심장과 폐부까지도 꿰뚫어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찰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십니다. 정의로우십니다. 억울한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통찰하시며 영혼을 지키십니다. 모든 생명이 하나님 보시기에 귀하고 가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저울질하십니다. 그리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십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보기 싫은 사람이 있고, 불편한 사람이 있고, 가까워지기 힘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할지라도 우리는 진리의 편에 서야 합니다. 감정적인 마음으로,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른 이들이 나에 대해 그러한 마음으로 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올바른 자리에 서지 않고, 도울 수 있음에도 도움을 회피한다면 나도 언젠가 그런 상황 가운데 처해 있을 때 똑같은 모습으로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시련과 환난 중에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소망 중에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나의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사심 없이 옳은 일에 마음을 다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 주시는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