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시각의 차이가 있습니다. 시각은 무엇을 보고 있느냐는 판단의 문제입니다. 미련한 자는 눈에 보이는 가치만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가치를 볼 줄 압니다. 미련한 자는 과거에 얽매여 살아가지만, 지혜로운 자는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육신적이고 세상적이지만, 지혜로운 자는 영적이고 신앙적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길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약속을 이루시는 소망을 보기 때문입니다.
잠언기자는 25절을 통해 다시 언급하기를 이와 같은 어리석고 미련한 자는 결국, 아비의 근심이 되고 어미의 고통이 되고 만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부모에게 근심과 고통이 되는 자는 이미 패역한 심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특징이 죄악의 삶으로 오히려 의인을 핍박하는 행위를 서슴치 않습니다. 자신들의 악행을 감추기 위해서 행하는 행위가 의인을 핍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합 왕 때의 엘리야 선지자도, 유대인에게 돌을 맞은 스데반도, 헤롯에게 목 베임을 당해 죽은 세례 요한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오늘날에도 의롭게 살려고 하면 많은 핍박이 있습니다. 사회가 너무 악하여서 양심과 정직으로 살려는 사람이 따돌림을 당하는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의인을 벌하는 것과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리는 것은 선하지 못합니다.
말을 아낀다는 것은 말을 가려서 한다는 것입니다. 말에 대한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신중하게 생각하면서 말을 하게 되면 말을 아낄 수 있고, 말로 인한 실수를 줄일 수 있습니다. 생각없이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말 속에 허물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말은 자기 자신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말하다보면 미움, 시기, 질투, 복수, 사악한 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실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침묵은 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침묵이 냉정함인데, 부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흥분하지 않고 혼란에 빠지지 않고 상황파악이 되어 절제합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 말만하고 책임질 말은 하지 않습니다.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가 요구됩니다.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절제함과 명철함 없이 되는대로 말을 하다보면 가벼움이 드러납니다. 연약함과 미련함이 드러납니다. 말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을 잘 볼 수 있는 사건이 바로 간음한 여인을 심판하실 때입니다. 침묵하시고, 땅에 무언가를 쓰시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기 위해 모인 많은 사람들의 양심을 찌르는 간결하고 정확한 말씀입니다.
말을 하는데 있어 기본요소가 있습니다. 예, 아니오가 분명해야 합니다. 의사표시가 분명해야지 벙어리처럼 끝까지 침묵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서로 간의 의사소통이 잘 되어야 하고,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말이 아닌 예의와 교양이 있는 말을 해야 합니다. 절제되고 쉬운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감동을 주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 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설득력과 감동을 주는 언어는 인생의 승리자, 성공자가 됩니다. 말은 존재의 집입니다. 말이 많으면 가난해지고,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입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도 갚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말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 나타나야 합니다. 때에 필요한 말, 반드시 필요한 말, 사람을 위로하고 생명을 살리는 말,........ 하나님의 자녀다운 말을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