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절 말씀에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고 했습니다. 요4장에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나옵니다. 이 대화에서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샘이란 바로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의인의 입은 왜 생명의 샘물이라고 합니까? 의인의 입에서는 항상 하나님의 교훈의 말씀이 흘러나오므로 듣는 자로 생명을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악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마음에 있는 악한 것을 토하기 때문에 그 말을 듣는 자의 생명을 해하는 것입니다. 악인의 원흉은 사탄입니다. 사탄은 그 입에서 나오는 말로 아담을 타락시켰고 그로 인하여 온 인류로 죄의 종이 되게 했습니다. 흔히들 사람은 말하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은 그 입의 말로 자기 의 사상, 자기의 마음,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벙어리 냉가슴 앓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세상에서 말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만큼 답답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람들과 교통하십니다.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하신 것도 아마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말씀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나타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히1:1절에서 ‘하나님은 그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될 수 없었다면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입술이 있고 우리의 입술로 우리의 의사를 상대방에게 자유롭게 전달할 수 있지만 이 입술의 말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크다는 사실을 깊이 알고 입의 말을 조심하는 사람은 정말로 적은 것입니다.
그런데 잠언서에서는 이런 언어 사용에 대하여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9절 말씀에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렵다고 했습니다. 말이 많은 사람은 그 많은 말 중에서 자신의 실수를 많이 드러내 놓게 됩니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마음의 부패한 더러운 것들이 우리의 입을 통해서 말로 나올 때, 그 사람의 거짓된 것이 드러나게 되며 가증한 것이 밖으로 나오며 그 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아니라 입으로 나오는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 하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찌끼가 되어 뒤로 배설해 버리지만 사람의 말은 그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입을 통해서 모두 토해내기 때문에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을 억제하는 것은 올바른 도덕 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이 됩니다. 사람이 죄악된 마음의 생각을 억제하거나 근신하므로 억누르지 못하면 이 세상의 도덕 생활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인간 사회가 하나의 이성 없는 동물 사회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제어가 입의 말의 제어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경험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인품이나 인격을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거짓말을 많이 하는 사람의 인품은 그의 인격 자체가 거짓된 인물인 것입니다. 입으로는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 사람이 그의 마음이 선량하거나 그의 인격이 고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욕설을 퍼붓고 말을 가리지 않고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은 지극히 야비한 인품의 소유자입니다. 이런 사람들과는 그 곁에 함께 서 있는 것조차도 사실인즉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에 대하여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가 구하는 것과 미련한 자가 구하는 것이 너무나도 많은 차이가 납니다. 지혜로운 자는 사랑을 구하고 미련 자는 미움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교훈하는 말씀은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에 대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새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자들은 어디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다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팔복 중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화평은 지혜로운 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요 다툼은 미련한 자를 통해서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는 첫째로 하나님과 나와의 화평이 있고 또 나와 내 형제와의 화평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사랑의 특성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지만 일차적으로 상대방의 허물을 가리워주는 일을 합니다. 잠17장에서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허다한 허물을 덮어주셨습니다. 우리도 이 같은 주님의 사랑으로 내 형제들의 허물을 덮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허물을 덮어 준다는 말은 이처럼 먼저 그 허물을 용서해 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허물을 비밀로 간직해 두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이 혹 그 허물을 들추어내어도 그것을 가려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 허물을 마음에 담아 두지 아니하고 이전보다 더 큰사랑을 베푸는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바라 볼 때 모든 허물은 감추어지고 좋은 점만 보이고 그 사람을 아끼고 사랑스런 마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생각하며 서로 사랑하는 교제로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지혜로운 자의 입술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사랑을 가지고 내 형제를 대하고 있습니까? 이 어려운 세대에 우리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 서로 열심히 사랑하는 생활로 마지막 이 세대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단장을 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서
2017.09.14 10:18
미련한 자와 지혜로운 자의 차이(10장 11절-21절)
조회 수 506 추천 수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