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강해
주기도문 강해 11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2020.09.25 14:44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마 6:13)
오늘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대한 마지막 말씀이 되겠습니다. 여러분과 지난 10주에 걸쳐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대해 나누었는데요. 어떻게, 좀 기억이 나십니까? 제목만이라도 떠 올려 보실 수 있겠습니까? 1) 이렇게 기도하라! 2) 하늘에 계신 3) 우리 아버지 4)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5) 나라가 임하시오며 6) 뜻이 이루어지이다 7)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8)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9)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10)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 이렇게 10주에 걸쳐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오늘은 마지막 부분으로 흔히 ‘송영’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나누려고 합니다.
주기도문에 대한 첫 번째 나눔에서 주기도의 전체적인 구조를 살펴볼 때 누가복음에는 없는데 마태복음에만 기록된 부분들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를 들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청원이 누가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없는 것, 생략된 것 중 하나가 오늘 함께 읽은 ‘송영’ 부분입니다. 송영이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편지를 한번 생각해 볼까요? 용돈이 필요해서 편지를 썼다고 가정해보죠.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용돈이 필요한 이유에 쓰겠죠. 그리고 맨 마지막 부분에 보통 뭐라고 쓰죠? “빨리 보내 주실 줄을 믿습니다!” 아니면 “건강하시고 하시는 모든 일이 형통하시길 바랍니다”로 해야 할까요? 어리석은 질문이기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마찬가집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청원’에 대한 부분을 보면, 1)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3가지의 청원기도 2) ‘우리’로 시작되는 3가지의 청원기도로 되어 있다는 것은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이지요. 여러분! 그렇게 모든 기도를 한 후에 어떻게 마쳐야 할까요? 그래요! 여러분~ 당연히 맨 처음에 고백했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다시 한번 기억하며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송영’이며 오늘의 본문입니다. 마지막 시간, ‘송영’에 담긴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본문을 보면 무엇이라고 적혀 있습니까?
오늘 본문이 기록된 구절을 보면 각주 표시로 번호가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마 숫자 4가 적혀 있을텐데요. 그리고 밑에 보면 “고대 사본에, 이 괄호 내 구절이 없음”으로 적혀 있을 것입니다. 풀어 말씀드리면, 여러분이 잘 아는 것처럼, 성경 원본은 없습니다. 다만 사본만이 존재하는데요. 사본도 시대와 장소에 따라 여럿 존재하는데 아주 오래된 헬라어 사본에는 오늘 우리가 읽은 구절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후대의 사본에만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종합해 볼 때, 결국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원래의 기도에는 이 구절이 없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 송영이라는 것이 엉터리라는 말씀일까요? 마태가 그냥 할 일 없이 덧붙인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유대교의 기도 관행을 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원래 유대교의 기도 관행을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축복하는 ‘송영’ 없이 끝나는 기도는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송영은 대단히 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주기도에 나오는 송영과 비슷한 형태의 많은 송영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에는 주기도문에 나오는 송영이 비롯되었다고 생각되는 전형적인 송영이 나타납니다.
대상 29:10-11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이르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신약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계 5:13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예수님 당시 ‘송영’은 전통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송영이 빠진 누가복음의 것이 원래의 것이라 해도 그 기도 끝에는 항상 송영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송영이 기도에 이미 전제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마태복음의 나중 사본에 덧붙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복음의 확장과 관계가 깊습니다. 복음이 확장되면서 헬라 교회가 발전했고, 유대교의 관행을 잘 모르는 이방 그리스도인이 점차 교회 안에 많아졌기 때문에 그들을 가르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 끝에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송영도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덧붙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비록 주님께서 송영 없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하더라도 그 기도 끝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전통으로 전해지던 송영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우리도 본문에 기록된 대로 송영을 해야 합니다. 이 역시도 우리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후에 찬양대가 송영을 하는 것처럼 송영은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이 본문을 읽으면서 이것이 무슨 표시인지 정확히 알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겠습니다.
2. 찬송가 636장 6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과 비교해 보면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습니까? ‘대개’라는 단어입니다. 우리 성경엔 없고 찬송가 가사에는 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우리가 함께 외우던 주기도문에도 ‘대개’라는 단어가 있었지요. 개정된 주기도문에서는 빠졌지만. 그러면 왜 이 단어는 있다가 없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헬라어 원문에 있는 ‘호티’라는 문장 부호의 쓰임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헬라어 원문을 보면 ‘호티’라는 문장 부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호티’라는 문장 부호의 용도가 다양해서 논쟁이 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하나의 용도만 가지고 있는 단어라면 문제 될 게 전혀 없는데, ‘호티’의 용도는 3가지나 됩니다.
1) 앞뒤의 문장을 연결하는 역할입니다.
이런 용도로 ‘호티’가 쓰이면, 그 뜻은 ‘왜냐하면’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왜냐하면’으로 번역하면 내용이 아주 매끄럽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 주기도문의 번역에서 이 문장 부호를 번역한 것입니다 ‘대개’라고 말입니다. ‘대개’를 한자로 풀어서 보면 ‘큰 대(大)’, ‘덮을 개(蓋)’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일의 큰 원칙으로 말하건대”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렇게 보면, ‘왜냐하면’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대개’라는 단어를 넣어 사용한 것입니다. 그 흔적이 바로 찬송가 636장입니다.
2) 관계대명사 절을 이끄는 접속사 역할입니다.
이것도 ‘호티’라고 하는 문장 부호의 역할입니다. 접속사는 앞문장과 뒷문장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하는 역할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의 문장을 NIV 성경으로 보면, “I am who I am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who’가 관계대명사로서 뒤에 나오는 문장을 이끌게 됩니다. 그런데 해석할 때, 굳이 번역하지는 않습니다. ‘호티’도 이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3) 굳이 번역하지 않아도 되는 단어입니다.
많은 번역본에서는 바로 이 전통을 따릅니다. 굳이 번역하지 않아도 되는 전통을요. 그러다 보니 요즘 우리 주기도문에서도 ‘호티’를 굳이 번역하지 않게 된 것이지요. 저도 이것이 적절하다고 봅니다. ‘대개’라는 단어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를 번역하지 않는다고 해서 주기도문의 의미가 왜곡되거나 변질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바로 ‘송영’을 드리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새로 번역된 주기도문에 그래서 이 단어에 대한 번역이 없습니다. 왜 없지? 이단인가? 이런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이런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어느 교회를 가서 예배를 드리든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요.
3. 그러면 ‘송영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송영의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그것은 바로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마음껏 높여드리는 고백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송영은 우리가 가장 무게 있게 다루는 세 단어를 소개합니다. ‘나라 / 권세 / 영광’이 그것인데요. 결국, 이 세 가지를 한데 묶어서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있음을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인 이해를 위해 한 단어씩 살펴보도록 하지요.
1) 나라 / 주님께서 공생애의 삶을 사시던 당시 세계 최강의 나라는 ‘로마’였습니다. ‘로마’라는 단어가 주는 위압감은 상상을 초월하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듯 당시 ‘나라‘에 대해 말할 때는 “나라가 로마 황제에게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나라’가 로마 황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세상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세상의 왕들 위에 “더 큰 왕의 왕이 계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나라 중에 나라”가 존재함을 고백하는 말이 바로 이 ‘나라’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라가 당신의 것이니이다”
2) 권세 / ‘권세’를 헬라어로 보면 ‘듀나미스’입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힘’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힘’을 가진 ‘보이지 않는 힘’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헬라어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가 바로 ‘다이너마이트’입니다. 여러분! ‘다이너마이트’가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시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권세’는 ‘권능’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권세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권능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권능, 그 어떤 힘보다 크고 강한 힘, 권능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권세가 당신의 것이니이다”
3) 영광 / ‘영광을 받는다’라는 말은 ‘높임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는 ‘찬양을 받는다’는 의미도 됩니다. 두 가지의 의미를 종합해 보면, ‘영광을 받는다’는 것은 ‘찬양과 높임’이 곁들여진 존귀함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광 받기’를 갈망합니다. 다시 말해서, 많은 이들에게 존경 받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이러한 것에 집착하게 되고, 맛 들이는 되는 순간 ‘교만’하기 딱 좋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든, 믿지 않든 인간은 이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는 자들에게 ‘모든 찬양과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임을 고백하는 이 고백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이 고백이 들어가 있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니이다”
결국, 이 세 단어들, 즉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은, “나는 오직 하늘 아버지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라는 서원적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굉장히 중요한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기에 우리는 주기도문을 할 때마다 이러한 의미를 되새기며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4. ‘아멘’입니다.
기도를 마치면서 ‘아멘’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입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인데요.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흔히 말씀하실 때 자주 사용하시던 ‘진실로’, ‘확실히’라는 단어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 하나인 “내가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은 “아멘 아멘 레고 휘민”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에서 ‘아멘’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진실로 그렇습니다.
이것은 드려진 기도가 진심에서 나온 기도임을 보증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 대표기도를 하고 있을 때, 그가 기도할 때 내가 ‘아멘’이라고 화답을 한다면 그것은 바로 “저의 마음도 그렇습니다”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말씀입니다.
2)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자신의 기원을 담아 다시 한 번 마음으로 고백하는 간절함의 표현이 바로 ‘아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결단을 담고 있는 것도 바로 ‘아멘’입니다. 이렇게 보면, ‘아멘’은 그냥 아무렇게나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담아 고백하고 결단하는 말이 바로 ‘아멘’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생각 없이 내뱉는 ‘아멘’이 없기를 바랍니다. 습관적이고 타성에 젖은 아무런 감동도 없고, 결단도 없는 마음으로 ‘아멘’을 남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한 포로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춥고 어두운 저녁, 여러 차례 얻어맞은 수백 명의 포로들이 1시간에 걸친 일장 연설을 듣고 행군 후 막사로 돌아왔습니다. 남은 밤 시간 동안, 침묵할 것을 명령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어느 막사에서 누군가 ‘주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옆자리에 누워 있던 동료 포로 몇이 동참합니다. 그러더니 옆 막사로 전달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로 기도가 끝날 때는 수백 명의 포로들이 도전과 신앙의 결단에 찬 우렁찬 목소리로 ‘아멘’을 외쳤다고 합니다. 당시 이들이 생명을 걸고 고백했던 ‘아멘’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해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대한 말씀이 끝이 났습니다. 여러분! 어떠세요? 여러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고백과 의미, 그리고 서원이 담긴 기도가 ‘주기도’라는 것을 조금은 아시겠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아주 중요한 기도요, 기독교의 모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냥 무의식적으로 하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담겨야 하고, 진심어린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적용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만이라도 정성을 다해 드린다면, 고백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좋은 기도요, 여러분의 믿음을 더욱 성숙시키고, 성장케 하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너무나 좋은 기도 / 균형 잡힌 기도 /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도가 바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 기도를 늘 우리 기도의 모형으로 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의 삶의 고백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되어 여러분의 모든 삶의 자리가 우리 주님의 뜻을 이루는 자리가 되어 세상 어디에서든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는 역사와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와 형통의 복이 여러분의 평생에 항상 가득하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의 고백이 끊이지 않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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