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강해

이렇게 기도하라

(6:9)

 

  오늘부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관해 여러분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주기도문하면 어떤 생각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일반적으로, ‘주기도문은 성도들에게 매우 친근한 기도인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매일 낭송하며 기도할 만큼 자주 대하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주기도문의 가치에 대해서는 그렇지는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주기도문은 그저 예배 마칠 때 하는 기도의 정도, 또는 주일예배 때 기도 담당자가 기도한 후, 이어서 하는 기도의 정도로만 생각한다는 게 오늘 우리가 주기도문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입니다.

  꽃다운 나이에 혼자되어 외아들을 생명처럼 여기며 키워낸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몸이 으스러지는 줄도 모르고 분에 넘치도록 뒷바라지했고, 이 아들은 훌륭하게 성장하게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어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정착하게 됩니다. 아들은 고향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위해 매달 정성을 담아 송금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늘 굶주렸고 동네의 험한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머니를 돌보지 않는 불효한 자식이라며 아들을 욕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사랑하는 아들을 보지 못한 채 어머니는 쓸쓸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이 도착하기 전, 마을 사람들은 장례를 치르기 위해 할머니의 방에 들어갔습니다. 그 순간 마을 사람들은 허탈감에 빠졌습니다. 할머니의 방 벽은 달마다 아들이 송금해온 수표로 도배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워하던 아들이 보내온 수표를 단순히 편지로 알았던 어머니는 그것을 붙여놓고 아들을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르면 아무리 귀한 것을 가지고 있어도 누릴 수 없게 되고, 별 의미가 없게 됩니다. 수표도 그럴진대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주기도문의 가치를 크게 두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를 때, 가슴이 뛰어야 하고, 벅차오르는 감동에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있어야 하는데, 무슨 주문을 외듯이 그냥 허공에 대고 외치고 끝내버리는 오늘 우리의 자세에는 별문제가 없는 걸까요? 향후 몇 주간 함께 나누는 설교를 통해 주기도문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달라지기를 소망합니다. 주기도문의 본문은 사복음서 중에서도 마태와 누가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69-13, 누가복음 112-4절인데요. 마태의 본문을 중심으로 때로는 누가복음 본문도 참고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주의 기도또는 주기도문이라는 말에 대해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잘못 생각하면 말 그대로 주님의 기도라고 생각하기 쉽고, 또는 주님이 기도하신 내용이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죠. 그러나 주기도문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내용이 주기도문입니다. 그래서 주의 기도주기도문이라고 하기보다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라고 하는 게 더 좋습니다. 지금까지 사용해온 습관 때문에 하루아침에 명칭을 바꾸는 게 쉽지는 않겠지요. (사회자-인도자, 대표기도-기도 인도, 대예배-주일예배, 준비 찬송-사용 불가, 축복해 주소서-복 내려 주소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하나님의 위로가 함께하시길 ) 이렇게 정확한 명칭인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라는 것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왜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셨는가?”라는 질문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누가복음 111을 보면,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도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는데, 이제 선생님도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라고 요청하는 장면입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요청을 했다는 사실이 당시 상황으로 보면 매우 놀라운 장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인이었고, 유대인들은 기도에 대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제자들이 기도할 줄 몰라서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유명한 기도들이 이미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카디쉬라는 짧은 형태의 기도가 있었고, ‘18번 축복 기도’, 세모네 에스레라는 다소 긴 형태의 기도가 유대교 안에서는 공적인 기도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먼저, ‘카디쉬라는 기도는 유대 회당에서 설교 끝에 함께 낭송한 기도였습니다.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만 살짝 소개하면, “그분의 이름이 높여지고 거룩히 여겨지이다 그분이 그분의 뜻에 따라 지으신 세상 안에서그분의 위대한 이름이 영원에서 영원까지 찬양되소서. 이에 대해 말하라. 아멘”) 그리고 ‘18번 축복 기도(18개의 항목으로 된 기도문)는 유대인들이 하루에 세 번, 즉 아침과 오후가 시작되는 시간, 그리고 저녁이 시작되는 시간에 반드시 드려야 하는 기도였습니다. ‘18번 축복 기도야말로 모든 유대인에게 가장 기본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왜 제자들이 굳이 또다시 주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까라는 질문이 생기깁니다. 이 배경을 알아야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메시아가 곧 와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리라는 기대가 유대인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와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면 그에 앞서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새롭게 헌신하고 순종하는 일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일종의 부흥 운동(회개와 헌신, 순종)’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죠. ‘바리새인들의 운동’, ‘에세네파 운동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이런 부흥 운동을 한 사람 중에 우리가 잘 아는 세례 요한도 있습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이 외쳤던 메시지가 생각나시나요? ‘회개였습니다. 왜요? ‘천국이 가까웠으니까!’ 임박한 종말과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세례 요한의 메시지였던 것이죠. 그래서 그는 회개의 표징으로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을 강조했죠. 세례는 다른 말로 헌신의 상징이에요. 그래서 세례 요한도 회개와 헌신의 부흥 운동에 앞장섰던 사람인거에요. 중요한 것은, 이렇게 부흥 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학적인 이해와 이상과 소망 등을 담아 표현하는 특별한 기도문을 작성했고, 이것을 공유하며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세례 요한도 그의 제자들에게 그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도를 가르쳐주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지요. 그리고 본격적인 공생애를 시작하시는데, 첫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마태복음 417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그래요! 우리 주님도 회개를 선포하며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십니다. 세례 요한이 극도의 금욕적 삶을 요구했다면, 우리 주님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따라 죄인을 영접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선언하고, 그들과 먹고 마시며 함께하신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 중 하나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의 위치는 더 놀랍습니다. 짜임새 있는 본문으로 유명한 마태복음에서 특별히 보석과도 같은 설교인 산상수훈의 가장 핵심, 중심에 위치한 본문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마태는 그만큼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큰 강조점을 두었던 것인데요. 당시 유대인들이 추구했던 대표적인 경건 행위 3가지는 금식, 기도, 자선 행위인데요. 마태복음 6장은 자선과 기도와 금식에 대한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중에서도 자선과 금식 사이의 기도에 대한 말씀에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언급하면서 마태는 주기도문을 핵심에 두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격적인 주기도문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그릇된 기도를 먼저 말씀하세요

  첫 번째는, 유대인들의 그릇된 기도입니다. 5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유대인들의 그릇된 기도란, ‘외식의 기도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다른 말로, 사람들에게 보이는 기도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나는 기도하는 사람이다!”라고 공공연히 대놓고 말하는 행위와도 같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이와 같았습니다. 주님의 이 가르침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보이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6절에서도 주님은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은밀한 만남과 대화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두 번째는, 이방인들의 그릇된 기도입니다. 7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중언부언이라는 것은, ‘많은 말, 혹은 의미 없는 말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중언부언의 모습은 우상을 향해 하는 기도가 대표적입니다(갈멜산-엘리야와 대결한 바알 선지자들의 모습). 당시 사람들은 아무 때나 길게 기도하고 중언부언하며 기도하고도 자신이 좋은 기도를 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처럼, 이방인처럼 기도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8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그래요!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에 유대인처럼도, 이방인처럼도 기도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기도는 유대인의 기도와도 다르고, ‘이방인의 기도와도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인데, 예수님의 제자라면 지금 예수님께서 새롭게 가르치는대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주기도가 중요한 것이에요. 단지 예배 마무리용이나, 기도 마무리용으로 취급될 기도가 아니라, ‘성도라면 항상 해야할 기도의 표본이 바로 주기도라는 것을 여러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본격적으로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기도를 시작하면서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바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입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하면 참 귀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앵무새처럼 그 기도를 반복해야 한다고 하신 걸까요? 그러면 유대인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의 의도는 이어서 가르쳐 줄 기도에 담긴 의미를 온전히 이해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쉬운 말로, 성도의 모든 기도는 모양이나 형식에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기도에 부합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기도를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앵무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만약 내 자식이 나와 대화하는데, 자기 말은 없고 온통 다른 사람의 말만 인용하기만 하면 어떤 부모가 좋아하겠습니까? 속 터지죠!).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두 가지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기도하라는 말씀에는 우리에게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인정하셨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얼마라 놀라운 은혜인가요? 이 은혜는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기에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7:7~8(읽고) 그래요! 우리는 구하고 찾을 자격이 주어진 존재들입니다. 왜냐구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의 기도하라는 명령에는 우리에게 엄청난 특권이 있다는 말씀이 담겨 있는 것이에요. 그것은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죠. 두 번째는, 응답에 대한 약속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기도를 따라 기도하는 우리에게 벌써, 이미 하늘 아버지의 허락이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7:11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할렐루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 약속하신대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기도할 맛이 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우리의 기도가 올바른 기도인지를 성찰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입맛대로 하는 기도는 버려야 해요! 주님께서 괜히 가르쳐 주신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허투로, 또는 아무 생각 없이 앵무새처럼 내뱉는, 무슨 주문 외듯이 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기도는 근본 없는 기도와도 같습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와 문제와 아픔과 눈물을 이미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우리의 기도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셨다는 의미도 담겨 있는 것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복음주의 신학자인 제임스 패커의 말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은 그리스도인이 믿고, 행동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을 제 각각 요약해주는 세 가지 훌륭한 기독교 신조다. 특히 주기도문은 놀라울 정도로 함축적이다. 그 안에는 수많은 의미가 들어 있다. 그것은 복음의 요약이며, 신학의 몸통이다. 간구의 원칙이자 살아가는 모든 일의 열쇠이다.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를 주기도문보다 더욱 명확히 밝혀주는 것은 없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진정한 성도라면, 주기도문이 여러분의 삶의 방향이어야 하고, 목표여야 하며, 매일 간절함으로 드리는 기도여야 합니다. 이 한 주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은혜 아래서 여러분의 삶에 새로운 은혜와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주님의 사랑이 가득하여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새롭게 되는 치유와 회복과 승리가 강 같이 넘쳐흐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